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의 다지 May 19. 2024

MBTI가 고마운 이유

스물두 번째 편지: 청춘과 마음의 감기

요즘에는 MBTI나 애니어그램 같은 성격유형검사가 다양하게 재생산되고, 마치 게임처럼 즐기고 공유하는 것에 익숙하지. 첫 만남에서 어느 정보의 개인 정보가 들어간 혈액형이나, 별자리 대신 알파벳 4개로 자기소개가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깔끔하고 편하게 느껴지던지.


이런 성격유형검사가 일상에 온전히 녹아든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아. 학창 시절 워크넷이라는 노동부 사이트를 통해서 진로 과목시간에 몇 번 하기는 했어도, 시켜서 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고, 해당 결과지를 바탕으로 어떤 과가 잘 어울릴지 상담을 해야 해서 종종 거짓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모든 성격 유형에 장단점이 있다는 것과, 스스로에게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는 점에서 나는 MBTI를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야. 근데 말이야, 혹시 10년 전도 지금과 같았다면 나의 20대 동안 스스로를 더 잘 지키고 아껴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스트레스나 상처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었을까?


28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4번 있어.


첫 번째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내가 19살 때까지 살던 고향은 어느 정도 이상의 내신 성적을 가지면 1 지망 - 6 지망 중 추첨을 통해서 배정이 되는 평준화 지역이었어. 하지만, 고등학교는 역시 수능을 준비하는 곳이라 그런지 경쟁이 만만치 않더라. 선행 학습은 무슨 학원도 다니지 않던 나는 1학기 만에 400명 중 32등까지만 거주할 수 있었던 기숙사에서 뻥 쫓겨났는데 그 한 학기 동안의 기억이 아직도 지워지지가 않아. 책상뿐 아니라 방도 모두 성적순대로 사용해야 하는 규칙, 생전 처음 보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 그리고 같은 그룹 과외 멤버가 아니면 무시하는 친구들. 졸고 있어도 깨워주지 않고, 성적 때문에 울고 있어도 웃으며 밥을 먹으러 다니는 분위기 속에서 내 성적도, 내 멘탈도 무너져 내렸던 것 같아. 집에서 소리를 지르고, 벽을 뜯는 일들이 많아지자 공무원이었던 아빠는 동료를 통해 정부지원 상담 프로그램을 예약해 주셨고, 정확히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알려주시지 않으셨지만, 내 머리에는 불을 단 더듬이가 촘촘히 박혀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


두 번째는 21살, 믿었던 친구의 엄청난 배신으로 우울증 증상이 나타나자 교내 상담센터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고 있던 친구의 추천으로 16주간 상담을 받았고, 코로나로 인해 3년 간의 계획을 포기한 채 워홀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왔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감에 처음 내 발로 정신과를 찾기도 했지. 세 번째 상담이었어. (사실 이때는 상담보다는 약만 받을 수 있었지만)


좋아했던 전공을 살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작지만 소중한 월급으로 경제적으로 부모님께 기생충처럼 붙어있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순식간에 행복해질 줄 알았지만,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과 언제나 날카로운 질문과 함께 인턴이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무거운 업무를 주시던 팀장님과의 회사 생활은 다시 나를 끝없이 세상에서 끌어내렸어. 요즘식으로 설명을 해보자면 그냥 극도의 ESTJ와 ENFJ와의 성격 차이에서 온 결과 같은데, 그때는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이유 없이 눈물이 떨어지는 날도 많고, 사고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했어. 지금 다시 팀장님을 만난다면 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업무적으로는 정말 멋있고 존경받아 마땅할 분이었어.


마지막 방문은 3년 전, 생각보다 길어지는 백수 생활에 불안감과 우울감이 저 세상 급으로 올라가 있을 때였어. 이때는 정말 심각했던 게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고, 사람들이랑도 잘 지내니까 아무도 내가 힘든지 몰랐지만 어느 순간 일어나기가 너무 힘들고, 얼굴에 표정이 사라진 거야. 하루는 아무것도 안 먹다가 다음날은 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매운 음식을 정신없이 먹어서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 장염을 달고 살았지. 다행히 이 시기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스페인식 파워 긍정 마인드에 조금씩 녹아내렸고, 조금은 평화롭고 다정한 (?)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면서 더 이상 병원도, 독한 약과도 이별할 수 있었어.  


그래서, 성격유형검사가 지금처럼 발달했다면 나의 20대는 더 나았을까?라는 답변에는 우선 "예쓰"라고 해볼게. 단 1-2분 만의 성격유형검사로 나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왜 다른 사람들의 이런 말과 행동에 유난히 더 힘들어하는지, 그럴 땐 누구랑 함께하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거니까.


예를 들어, 19살 때의 내가 사람을 너무나 믿고 또 불의를 참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21살의 내가 상황에 상관없이 계획에 무섭도록 집착한다는 걸 알았다면, 사회 초년생의 내가 남에게 짐이 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끔찍한 완벽주의자에 엄청나게 주변의 눈치를 본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인정하기는 싫었겠지만 원래 조금 더 다른 방식을 찾거나 나와 비슷한 또는 아예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편했을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이런 경우도 있었네.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에서 내 잘못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는 걸 힘들어한다는 걸 알았어.  남편과의 첫 여행에서 돈을 아끼려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무궁화 호 티켓을 샀는데, 실수로 포항행 기차를 탔고 어쩔 수 없이 4시간을 기다려 돈을 더 주고 KTX 티켓을 사야 했어. 나는 내가 너무 미워서 펑펑 울었는데 남편이 "나 너랑 더 있을 수 있는 거야? 오? 근데 왜 울어? 일단 티켓부터 살까? 너 멀미도 심한데, KTX 타면 더 좋지 왜' 하면서 까르르 웃는 거야. 일을 할 때는 정말 안 맞는다고 생각한 ENFP 유형인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마주하는 슬픔과 짜증을 또 다른 추억과 재미로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면서도 고맙더라고.


그러니 재미 삼아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다양한 성격검사를 해보는 걸 추천해. 그리고, 혹시 이미 몸과 마음이 아프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가 어렵다면 무서워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병원에서 꼭 상담을 받아보자. 처음에 나는 한 발 내딛는 것이 정말 너무 힘들었는데, 생각보다 이 마음의 감기를 앓는 사람은 엄청 엄청 많고, 조금만 잘 찾아보면 정부에서 지원을 해주기도 하더라고 (기준이 조금 까다롭고, 지역마다 편차도 큰 것 같긴 해) 그리고 방문 전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만큼이나 걱정했던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 바로 비용인데, 처음 방문 시에만 다양한 검사를 하느라 3만 원 정도 들어가고 그 후로는 상담 + 약 값해서 8천 원 전후로 나왔던 것 같으니 이런 걸로 병원 갔다가 텅장되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물론, 다른 병원들에 비해 아직 가격대가 있고, 학생이라면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회에서 정한 기준에 억지로 나를 맞춰가려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과 마음이 아픈 청춘들이 많은 것 같아. 모두가 알아주는 학교, 근사한 직장, 화려한 스펙 이런 것들도 물론 너를 빛나게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삶은 길고 우리 사는 동안은 건강해야 하니까, 잊지 않고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많이 아끼고 신경 써주자. 성격유형검사가 진로 시간 혹은 상담 센터에서만 만날 수 있던 것에서 하나의 문화가 된 것처럼, 마음이 아파도 무조건 혼자 참는 것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든 쉽고 편하게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 평범한 일상이 되길 바라며, 나도 과도한 계획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조금 더 자유와 여유를 주는 사람이 되어볼게.


그럼, 일주일도 파이팅이야.















이전 22화 삶에 20대가 꼭 필요한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