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편지: 나만 같은 곳에 멈춰있다고 느껴진다면
지난 한 주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1년 반이 넘도록 잘 다니던 회사의 경영 악화로 인해 갑작스럽게 퇴사를 하게 되었고, 몇 년간은 없을 줄 알았던 지인들의 결혼﹒ 임신 소식과 함께, 20대의 모든 순간을 함께한 친구의 이민 결정까지 듣게 되었거든. 인생의 희로애락을 단 며칠 만에 모두 경험한 느낌이었지. 급하게 회사를 나오게 되었지만, 멋진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들을 쌓았기에 후회는 없었고, 인생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친구에게도 아낌없는 축하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집에 오는 발걸음이 무겁더라.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지금, 예전에 우연히 본 짤이 자주 떠올라.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왼쪽에는 '나의 아이 둘' 오른쪽에는 '나의 아이들'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일상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에서 공감이 많이 되거든. 어떤 친구들과는 하루종일 주식투자와 부동산 이야기를 하고, 또 다른 이들과는 하루종일 임신과 육아에 대한 가치관을 나누며, 창업, 이민, 대학원 등 새로운 준비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를 나누는 것이 물론 즐겁지만 어쩐지 가끔은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외딴곳에서 둥둥 떠다니는 오리배 같아서 불안했던 것 같아.
마케터로서 누구보다 시장 트렌드와 돈의 흐름에 민감할 거라고 예상하지만, 주식은 무슨 전세 대출도 처음이라 덜덜 떨면서 받고, 지난해 결혼을 했지만 저출생으로 고민하는 정보를 웃게 할 임신 계획은 전혀 없으며, 한때 해외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내 나라가 주는 포근함을 알아버린 사람이라서 그런가 봐.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혹은 인생에서 다들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데 나만 19살에서 그대로 멈춰버린 건 아닐까 싶고.
근데, 진짜 어른이 되려면 이 모두를 충족시켜야 할까? 수많은 라이프 스타일이 생겨나고 또 존중받는 지금 시대에 나는 왜 또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따라 주눅 들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걸까 생각해 봤어. 그리고, 내가 앞에서 말한 친구들의 모습을 어른이라고 생각한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지. 바로, 내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고, 나만을 위해 방향을 정할 줄 알며,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줄 안다는 거야. 그 기준은 모두 다르지만 말이야.
지금 내 삶의 우선순위는 경제적 풍요도, 나를 닮은 아이도, 내 이름을 딴 회사나 새로운 나라에서의 도전도 아니야. 나를 인정하는 곳에서 치열하게 일하며 내 가족들과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거지. 그럴 수 있다면 어느 나라에 살든 크게 상관없고. 그래서,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맞지만 다르다고 걱정할 필요도, 내가 늦은 건 아닌지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친구들 역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호수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을 테니까. 때때로 불안해하면서, 하지만 또 꾸준히 나아가면서.
네가 있는 19살은 오랜 시간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학교에서 나와 각자의 길을 찾는 첫 번째 시기로 누군가에게는 자유를 또 누군가에게는 혼란과 방황을 줄지도 몰라. 그리고 내가 있는 29살은 상상하지 못했던 주변의 수많은 변화에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나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몇 번의 방황 끝에 나만의 20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나의 가치관과 소중한 관계를 잘 지키다 보면 더욱 성숙한 30대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 믿어.
19살 때 졸업 선물로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을 받았던 기억이 나. 그때는 내가 어른이 되려면 무슨 천 번이나 흔들려야 해?라고 괜스레 반항심이 들었는데 이제는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 천 번까지는 아니더라도, 차곡차곡 쌓인 고민들과 방황이 네가 생각하는 어른이 되는데 영양분이 되길 바라며, 우리 몸과 마음이 모두 튼튼한 어른이 되어보자.
그럼, 오늘 편지도 이만 줄일게!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고민이 많은 요즘이라 지난주에 연재를 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일을 쉬어가는 김에 꾸준히 글을 쓰며 마음을 다잡아 봐야겠어요 :) 부족함이 많은 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