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0만 장이 넘는 사진 속 진짜 나는 없었다
사진 찍는 것을 참 좋아한다.
워낙 단기 기억력이 짧아 기억이 빨리 사라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붙잡아 두고 싶어서 사진을 많이 찍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영상으로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이번 달부터 본격적인 취업 준비에 돌입하면서 머리와 몸은 지치고 마음은 많이도 차가워졌다. 원래는 스트레스를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푸는데 취준생 주제에 서울 월세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고향에 내려와 지내느라 친구들도 없다. 결국, 스스로 스트레스를 푸는 법을 찾았다. 바로 클라우드를 열기. 다른 사람들은 깨끗하게 잘만 유지하는 이 클라우드를 6년 동안 제대로 정리 한번 안 하고 그대로 묵혀 두었다.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다. 게다가 아이디 하나로 6년을 버티느라 이미 기본으로 주어지는 30GB을 다 쓰고 새로운 사진은 계속 업데이트 상태로 놓여 있는 완벽한 아노미 상태. 이번 달에는 반드시 정리하겠노라 다짐한다.
대학에 입학해 클라우드를 시작했던 2014년 3월부터 맥락 없이 쌓아져 온 클라우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으로 보았다. 6년간의 자료는 정말 방대하고도 끝이 없었다. 그래도 지루하진 않았다. 잘못 찍혀서 갤러리에서는 바로 지워버린 사소한 에피소드까지 다 들어가 있었으니까. 또, 인생의 흑역사로 남았던 전 남자 친구들과의 연애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고, 보노보노 저리 가라 하는 PT의 P도 모르는 새내기의 발표 자료도 있었다. 한참을 재밌게 보고 있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사진 속의 나의 모습은 다 똑같을까.
분명 다 다른 상황에서 찍었던 사진들인데 표정에 따라 당연히 변해야 할 내 눈코 입은 그대로일까.
지금은 이름마저 촌스럽게 느껴지는 '포토원더'라는 어플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진 보정 어플 때문이었다.
외모가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줬던 얼짱시대를 보면서 자란 유년기를 지나 학급의 반이 넘게 쌍수를 했던 청소년기를 거쳐, 대학에 와서도 대학내일, 학교 표지 모델이 되려면 특별한 이력에 얼마나 고운 얼굴이 뒷받침되어줘야 하는지 알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외모에 대한 집착은 당연했다. 물론 여기서 외모는 남이 보았을 때 예쁜 외모 말이다.
사진만 찍으면 작게 나오는 내 눈이 싫어 무표정 혹은 조커처럼 입만 웃고 있는 사진이 많았고, 그걸로도 부족해 보정 어플로 성괴처럼 보이는 딱 그 전 단계까지 눈을 키웠다. 풋풋함의 상징이던 볼살은 얼굴을 크게 보이게 해 준다고 생각해 턱과 함께 열심히 깎고 또 깎았고 짧은 치마 밖으로 삐죽 나온 허벅지 살을 '갸름 효과'를 줘서 또 열심히 집어넣어 젓가락처럼 만들었다. 겨우 사진일 뿐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속의 내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게 날 행복하게 했다. 진짜 내가 아닌데도.
25년 인생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내가 찍는 사진들이, 아니 내가 만드는 사진들이 기형적인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바뀐 가장 결정적 이유는 호주 워홀에서 다시 만난 학과 후배의 말 한마디였다. 버블티를 마신 후 함께 사진을 찍자는 소리에 또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드는 그 어플들을 나도 모르게 켰다.
언니, 이건 우리가 아니잖아. 우린 이렇게 안 생겼어.
우리가 아닌 건 멋지지 않아. 다 가짜야.
그 친구는 모르지만, 그날 그 친구의 인스타를 구경했다. 보정 어플 하나 없이 웃고 싶을 때 웃고 장난치고 싶을 때 장난치고 놀랐을 때 놀란 표정이 다 담겨 있는 그 친구의 사진첩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정말 추억을 담고 있는 건 그 친구의 사진첩이었고, 내 것은 추억으로 위장한 전시회장일 뿐이었다.
그 뒤로는 진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진짜 내가 있는 진짜 나의 사진 말이다. 표정 없이 눈코 입만 뚜렷하게 보이는 그런 사진 말고, 상황에 맞게 내 감정을 다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진을 쌓기 시작했다.
겨우 사진일 뿐인데, 마음이 참 시원해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진짜 내 얼굴을 마주하자 오히려 자신감이 생겼다. 사진 찍는 것도 재밌어졌다. 예전에는 참 부담스러웠는데.
클라우드에 있는 30000장이 넘는 나의 사진에는 내가 없다. 그리고 다시 그걸 되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앞으로 클라우드에 쌓일 또 다른 30000장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게 진짜 나고 그게 진짜 내 사진첩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