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내 나이 스물여섯.
그 흔한 인턴 경험도 전공 관련 자격증도 그렇다고 해서 딱히 내세울 특별한 이력도 없는 취준생으로 살아온 지 벌써 6개월이 흘렀다.
졸업을 하고 큰 맘먹고 떠난 호주에서 난 단 5개월 만에 코로나에 무릎을 꿇었고, 그렇게 안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현실과 타협은 한지 오래.
두 겹의 마스크와 장갑까지 끼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즐거웠던 친구들과의 헤어짐이 슬퍼서, 그리고 노트 한쪽을 가득 채웠던 호주에서의 내 목표들을 포기해야 했던 게 너무나 억울해서.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인생의 대부분을 산 한국에서 어느샌가 금방 적응해 '내가 호주에 있긴 했었던가. 꿈이었던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전 세계의 나쁜 사이클을 끊는 일에 동참하고 싶어 국제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던 나는 또 어느샌가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도장깨기 하듯 준비하며 끝없이 써 내려가는 자기소개서와 이력서의 내 이야기에 지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 운이 좋게도 이번 달에 3번의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면접이었지만, 열심히 준비한 결과 직무 면접은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합격을 할 수 있었고 얼마 전 사업개발 본부장님과의 최종 면접을 볼 수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나와서 크게 당황했다.
마케팅 직무인만큼 관련된 경험 또는 인성 관련 질문들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앉자마자 나에게 하는 질문.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 음"
"편하게 대답해보세요. 답은 없습니다. 어떤 업계에서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속으로 100번도 넘게 젠장을 외치며)... 업계... 어떤 사람... 음...'
답이 없으니 편하게 말해보라는 소리에 20살 때부터 소중히 적어놓은 내 170개의 버킷리스트들을 공유하려 했었으나 다음 문장에서 그런 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업계 1%의 광고기획자가 되고 싶고, 그 이후에는 기갈나는 메시지를 뽑아내는 카피 라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함께 2번의 공모전을 했던 나의 절친한 친구가 무심코 던졌던 말, "너는 카피 잘 뽑아내. 카피 라이터 도전해봐."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 한 대답이었다.
거짓말이었다.
물론, 광고 기획도 카피 라이터도 너무 해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브랜드의 문제를 찾아내 솔루션을 제공하고 그 솔루션에 적합한 멋진 카피를 뽑아내는 건 황홀한 경험이니까.
하지만, 그건 내 '꿈'은 아니다.
이번 면접은 망했다 생각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곰곰이 생각했다. 나의 꿈은 무엇일까.
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것을 좋아해 혼자서라도 일 년에 두 번씩은 꼭 여행을 떠났고 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서 더 넓은 세상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기갈나게 글을 잘 쓰지는 않지만 10년간 꾸준히 일기를 써 올만큼 내 감정을 글로서 마음에서 머리에서 덜어내는 게 좋았다.
살면서 여성으로서 느꼈던 불쾌감, 아시아인으로서 느꼈던 인종차별, 학생 때 느낀 교육의 계층화 등등 내가 보고 경험한 것들을 소위 '똥 손'으로 스케치북에 옮겨 담는 것 역시 행복했고,
내가 가진 것을 남들에게 나눠주고,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게 좋아서 오랫동안 멘토링 활동을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하나씩 생각해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꿈을 가져야 할까? 꼭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하나?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럴 필요 없다는 것'
다트머스 대학의 졸업 연설 중 코난이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직업이나 특정한 커리어도 너를 정의할 수 없어. 꿈은 계속 바뀔 거야. 그래도 괜찮아'
그렇다. 어차피 꿈은 계속 바뀐다. 그래도 방향성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엄청난 목표와 비전이 없어도, 나를 살게 하고 싶게 만드는 버킷리스트 속 나의 재미있는 계획들과 함께라면 나는 지금 당장 꿈을 말할 수 없어도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니까.
다시 그 면접관님을 뵙게 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는 아직 꿈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제가 가장 힘들 때도 절 웃게 할 수 있는 수많은 경험들이 있고, 앞으로도 열심히 새로운 경험들을 쌓을 거라는 것입니다. 또한, 저를 움직이게 하는 170가지의 버킷리스트가 있기에, 그 목표들을 하나씩 이뤄가면서 그렇게 저만의 삶을 온전히 즐겨보려 합니다. "
이 말을 듣고 나를 불합격 처리시키든 '얘는 뭐야'라고 하든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뭐가 됐든 거짓말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