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스페인 언니들의 솔직한 인생 조언

나는 진짜 현실과 그 속에서 버티는 방법을 알려주는 언니가 필요했다.

by 보통의 다지

※ 사진: 넷플릭스


어느 순간부터 장르물을 제외한 한국 드라마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왠지 '완벽한 꿈' 같달까. 주인공들에게 시련이 오지만, 대부분 그걸 어떻게든 잘 이겨내고 그 과정에서 일도, 가족도, 친구도, 사랑까지 쟁취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사는 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한마디로 비현실적이다. 소설과 그 소설을 바탕으로 써지는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고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웠었는데, 나는 더 이상 그 현실을 드라마에서 찾을 수 없었다.


넷플릭스에서 한참을 방황하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스페인 드라마 '오! 발레리아'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인생 멘토들을 만났다.


마드리드에 사는 이 천방지축 4인방 언니들은 완벽하지 않다. 첫 화부터 월세를 낸 후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니까. 편안한 옷차림으로 없는 돈에 맞춰 대충 아침을 때우는 모습이 마치 서울에서 가난한 20대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 드라마에는 누구나 동경하는 이상적인 연애는 없고, 승승 가도를 달리는 완벽한 직장인도 없다. 서로를 가장 아끼지만 별 거 아닌 걸로 싸우기도 하고 가끔 나오는 가족과의 불화도 시즌 2 끝자락에 가서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정도? 하지만 뭐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 없는 이 스토리가, 실수의 실수를 연발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이 언니들의 모습이 나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힘을 주었다. 30살을 앞둔 언니들이 두 시즌을 거치면서 나에게 준 솔직한 인생 조언들을 세 가지를 공유하고자 한다.


첫 번째, 일에 관하여

: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번쯤은 과감해져 볼 것.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주인공인 발레리아는 작가가 꿈이었지만, 남다른 월세를 자랑하는 마드리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시 꿈을 접고 박물관 관리인으로 일한다. 변호사인 네레하는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법대를 졸업하여 부모님의 로펌에서 일을 하다 집을 나와 자신의 무엇을 잘하고 잘하고 싶은지 생각한다. 자신이 진짜 되고 싶은 모습을 찾아 이 두 명은 과감한 선택을 한다. 발레리아는 처음으로 일을 그만두고 집필에만 몰두해보고, 네레하는 새로 들어간 로펌을 그만두고 1인 행사 연출 회사를 연다. 그 과정에서 아파도 보고, 좌절도 해보고, 친구 집에 얹혀살기도 해 보고, 난방비가 없어 추위에 떨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일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는다. 물론 전보다 돈을 벌지 못한 적이 대부분이지만, 적어도 후회와 미련은 없이 살면서 말이다.


내가 여전히 호주 워홀 생활을 아쉬워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어떠한 환경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알면서도 현재의 상황이 조금 좋지 않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했다는 거다. 스펙 사회를 혐오하면서도 호주에서 사용할 수 없던 그 스펙이 아까워서 한국행을 선택했다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는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을 택한 적이 훨씬 많았고,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돈이 없어.'와 같은 변명으로 끊임없이 하고 싶은 것들을 삶의 밖으로 밀어냈다.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 시작은 신중하되, 고민이 끝나면 과감하게 행동할 것이다. 후회 대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두 번째, 연애에 대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최우선으로 둘 것. 그리고 상대방에게 솔직할 것.


이 4명 언니들의 연애 스타일은 너무나도 다르다. Open realationship을 추구하는 롤라는 이미 아내가 있는 세르히오와 섹스 파트너로 지내고, 네레하는 소심한 레즈비언이며, 카르멘은 사내연애를 하며 공사 구분에 어려움을 겪는다. 마지막으로 결혼 7년 차 권태기에 들어선 발레리아는 파티에서 만난 롤라의 친구 빅토르와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각자 다른 연애 속에서 그들은 가끔은 좌절하고 상처 받고 도망치기도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에 따라 연애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연애에서 우선순위로 설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표현한다. 잠자리에서는 더욱더.


그러고 보면, 모든 연애에서 나의 마음은 항상 뒷전이었다. 남들에게 행복한 커플처럼 보이기 위해서 연기를 했고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더욱더 나를 불행하게 했던 것은 나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그 결정을 온전히 맡긴 것이었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no를 no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기는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내 마음을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이제는 나의 마음과 몸의 행복을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에 나의 선택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연애의 목적은 '행복'이니까 말이다.


세 번째, 우정에 관하여

: 각기 다름을 인정하고, 화해를 하는 법을 배울 것.


이들이 MBTI 검사를 한다면, 상반된 결과가 예상될 정도로 4명의 성격은 너무 다르다. 이들의 연애관처럼 말이다. 그 덕분에 작은 것으로 싸우기도 정말 많이 싸우고, 각자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해서 상처를 주기도 한다. 평생을 부잣집의 얼음 공주로 산 네레하가 집안일에 대해서 하나도 모를 때 롤라는 핀잔을 주기도 하고, 독인 것을 알지만 유부남과 끝까지 섹스 파트너 관계를 이어가는 롤라를 친구들은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다시 모이는 법을 안다. 잘못이 있다면 빠르게 인정을 하고 온 마음을 다해 사과한다. 또 자신이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을 때에도 함께한다. 그 누구도 서로의 성공을 시기 질투하지 않고, 서로의 실패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옆에 있는다. 서로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면서.


사실 어디에나 완벽한 사람은 없고, 각자 살아온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100% 자신의 가치관과 꼭 맞는 친구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그냥 이해가 안 가서, 때로는 친구가 상처를 받을까 봐 지나치게 그녀의 인생에 간섭을 했다. 또 안 그런 척하면서도 친구가 내가 원하던 목표를 먼저 이루면 속으로는 질투를 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제는 잔소리 대신 그냥 묵묵히 들어주는 친구가 되고 싶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역시도 아주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최선의 결정일 테니까. 혹여 후회를 한다 해도 그 역시 그의 몫일 테니까. 나는 그때도 옆에서 내 나름의 최선을 다해 그의 행복을 빌어줄 것이다. 그들이 항상 내 옆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혹여 잘못을 하게 된다면 누구의 잘못이라고 따지기보다 먼저 가서 용서를 빌 것 같다. 기다리다 친구들을 잃는 것이 내 잘못임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것보다 더 힘들고 두려우니까.



나는 이렇게 일, 사랑, 우정에서 가끔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 완벽하지 않은 4명의 스페인 언니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견뎌나가는지를 보면서 나는 큰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 현실을 100% 반영한 그들의 고난과 실패 그 후의 단단해지는 모습은 너무나도 불안정한 27살의 내 모습을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다.


20살에는 이래야 한다. 27살까지는 이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30살에는 이런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철없고 불안한 나조차도 괜찮다고.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래도 된다고. 모두 그렇다고. 언니들은 나를 위로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현실과 드라마 속의 괴리감에 박탈감을 느끼고 '나만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내 걸음만 느린 게 아닐까? 걱정된다면, 오! 발레리아를 추천한다. 그리고 이 4명의 언니들을 만나게 된다면, 당신만이 느꼈던 인생 조언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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