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필요하지만,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닌.

계획 좀 없으면 어때.

by 보통의 다지

"이거 다 네 거라고? 이 많은 게? 너 정말 대단하다."

본가에 있는 내 방에 데려가면 수북이 쌓인 수첩들을 보고 친구들이 하는 말이다. 14년간 써온 소중한 플래너들과 일기들.


맞다. 나의 MBTI는 ENFJ.

J 중에 내가 상위 1%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기보다는 습관이 되었다고 하는 쪽이 맞겠다. 따라서, 나에게 즉흥 여행은 즉흥 여행이 아니다. 친구들이 숙소만 예약하고 편하게 올 때 나는 엑셀 파일에 이동 시간을 모두 고려한 일정과 맛집 후보군까지 추리니까 말이다.


중학교 1학년, 성적으로 밑바닥을 맴도는 아이 었던 나는 성적으로 차별을 하는 선생님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옆의 전교 1등은 나랑 치마 길이가 똑같았음에도 (나는 치마가 무릎 아래 10cm, 무채색 양말만 신어야 하는 학교를 다녔다) 나만 칠판 앞으로 종아리를 맞았다는 사실은 나를 분노하게 했고(2000년대 후반까지도 체벌이 가능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슬기롭게 선생님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건 바로 내가 그 1등이 되어보는 것이었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친구를 밀착 모니터링했고, 그 중심에는 스터디 플래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탁을 해서 본 그의 플래너에는 아주 정갈한 글씨로 쉬는 시간에도 빽빽하게 공부 스케줄이 차 있었고, 플래너의 앞 뒤에는 3년 후, 5년 후, 10년 후, 30년 후의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써 놓았다. 정확하게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나는 '계획'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고, 이 습관은 '전교 1등의 짜릿함'과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선물했다.


14년 동안 나는 그렇게 살았다.

계획을 잘하는 사람으로, 하지만 사실은 그 계획에 잡혀 사는 사람으로.


자기 전 아침 스케줄을 5-10분 단위로 쪼개고, 휴일에도 적어도 4가지 이상의 활동들을 계획해 놓으면서 실제로 하나라도 하지 못할 때 하루 종일 스스로를 자책하고 깎아내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에게 '계획 = 성취감 = 성공' 공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았고, 계획을 짜면 짤 수록 불행해져만 갔다. 이 습관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불안 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이자, 벗기 힘든 오랜 습관이 될 줄 예전의 나는 알지 못했지.


갑자기 생긴 업무 스케줄로 인해 8시가 넘어서 집에 온 오늘. 새로 옮긴 사무실 지하의 헬스장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지만, 나도 모르게 지하철을 바로 타버린 것이 너무나 화가 나서 또 나를 미워할뻔했다.


그래서 일기장을 꺼내 한 문장을 썼다. 오늘도 잘 살아주어 고맙다고. 운동을 못하고 와도 내일 하면 되고, 당장 글이 안 써지면 덮어도 되고, 책이 안 읽히면 가끔은 만화책도 읽어도 되고, 공부가 하기 싫으면 미뤄도 된다고. 다 괜찮다고.


계획은 삶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니, 당장 계획을 지키지 못해도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말자. 다 행복하려고 사는 것이니. 정말 내 삶에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지금 나에게 그것은 촘촘한 계획이 아닌, 안정과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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