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 나에게 100만 원을 선물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의 행복을 위해 거침없이 돈을 써보기로 했다.

by 보통의 다지

백수가 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다행히 첫 회사에서 8개월 동안 성실히 인턴생활을 한 덕에 매달 꼬박꼬박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백수가 된 이후 가장 먼저 결심한 것은, 조급해하지 말고 그동안 못해 보았던 것을 미련 없이 해 보자는 것이었다.


항상 잘하고 싶다는 절실함과 동시에 불안함 속에서 일을 했던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정말 메말라갔다. 이곳저곳 탐험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고 두 손을 다 쓰고도 남아돌던 나의 취미들도 함께 말이다. 게다가 6개월 차에 재택근무를 하기 어려웠던 셰어 하우스에서 탈출해 회사 근처에 6평짜리 조그마한 원룸을 얻은 이후부터는 돈이 들어가는 뭔가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시간도 돈도 없는 상황에서 나의 우울증과 불안증세는 점점 심해져갔고, 퇴사를 한 직후에도 수면제를 처방받아야 했다.


수면제를 처방받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냥 눈물이 똑 떨어졌다.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팍팍하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과 함께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사실 그 돈 몇 푼 더 쓴다고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아주 적게나마 모아둔 돈이 있었고, 이제는 적어도 5개월간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생존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냥 언젠가 필요할 차, 작은 집을 살 수 있는 다른 친구들과 비슷한 통장잔고를 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백수라 시간도 많겠다. 나에게 20대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통 큰 선물을 해 보기로 했다. 행복비용이라는 이름으로. 이 돈으로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하나씩 해보는 거야. 조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남의 시선을 위해서 쓰지 말자는 것. 예를 들어, 필요도 없는 옷이나 장신구들 혹은 피부 시술 등과 같이 나의 행복을 위해 굳이 필요는 없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댔던 것들과 멀어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되도록 '물건' 보다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활동'에 중심을 두고 싶었다.


계획을 한지 약 1달 반이 지난 지금, 행복 리스트 11개, 총 1,000,200원 중에서 9개, 총 889,000원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값졌던 것은 바로 24회 필라테스 수강권이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하루에 8시간이 넘는 나는 항상 어깨 통증에 시달렸고, 골반이 틀어져 있어 남들보다 더 매서운 생리통을 달고 살았다. 올해부터는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몸이 저리기 시작했는데 항상 비싸다는 이유로 미루고 또 미뤄왔다.


그렇게 난생처음 거금을 들여 시작한 필라테스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비싼 만큼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수면제와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스트레칭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몸에서 몇 번 했다고 중급 자세도 거뜬히 해 내는 내 모습을 보고 웃음이 절로 나왔고, 잘 못해도 괜찮다고 응원해주고 잘하면 무한한 칭찬을 날리는 선생님들 덕분에 무너져 있던 자존감이 정상궤도로 올라갔다. 나를 스스로 귀하게 대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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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감과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기분 좋게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남은 돈으로 읽고 싶던 책들도 잔뜩 사보고, 친구들과 스튜디오에서 사진도 찍고, 언어 교환 어플에서 만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리스트 하나하나를 지우고 행복비용이 늘어갈 때마다 '아, 내가 이런 것들을 좋아했지?', '내가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라고 알던 것이 새롭게 느껴지면서 조금씩 활기를 찾았다.


100만 원.


사실, 신입으로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되면 월급의 반도 안 되는 돈이다. 여행을 갈 수 있다면 왕복 비행기표로 사라질 수도 있는 돈이고. 하지만 이런 돈을 온전히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쓰기란 웬일인지 정말 정말 아깝게 느껴진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사는 술 값이나 XX비용으로 지르는 물건들에게는 쓸데없이 관대하면서 정작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나의 더 나은 모습을 위해서 투자하기까지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나도 항상 그랬으니까.


하지만, 만약 뭔가 내 삶이 잘못되고 느끼고 한 없이 검은 쳇바퀴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것 같다면 과감하게 나를 위해서 한 번쯤은 통 큰 현금 선물을 해 주는 건 어떨까? 생각보다 이 100만 원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많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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