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면 뭐해, 남는 게 없는데.

27살의 끝자락, 마케팅 신병 훈련소 입소를 결정하다.

by 보통의 다지

너무 편안해서 불안한 그런 날들, 다들 있지 않은가?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3회 차 실업급여를 받고 이마트에서 일주일치 장을 봐서 집에서 평화롭게 백골뱅이탕을 점심으로 끓여먹던 날. 그리고 병원에서 더 이상 수면제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날.


이런 날에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불안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인생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였다. 학부시절 때도 그랬고 8개월간의 인턴생활에서도 나는 남들보다 더 달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다. 성적이 반영되지 않는 교환학생에 가서도 1등에 목숨을 걸었고, 회사에서는 가장 빨리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인턴이었다. 그런 나를 친구들은 '사서 고생하는 변태'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좋았다. 지루하고 불규칙하고 편안하기만 한 내 삶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올해가 끝나기 전, 새로운 도전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바로 코드 스테이츠에서 진행하는 그로스 마케팅 부트캠프에 지원하는 것.


솔직히 말하면 무섭기도 했다. 내일 배움 카드를 사용해서 진행하는 무려 3개월간의 프로그램이었고, 팀 프로젝트부터 인턴십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혼자서 공부해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웠던 건 '한 살 한 살 쌓여가는 나의 나이와 그에 비해 보잘것없는 나의 경력'을 옆으로 제쳐두고 뭔가를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불확신이었다.


그래도 나는 'GO'를 택했다. 다음 직장에서는 '참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팀원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언론홍보학을 전공했고, 광고홍보 수업은 아무리 힘들다고 할지라도 다 들었고 아모레퍼시픽 마케팅 공모전에서도 두 번이나 입상을 했음에도 나는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열심히 했으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는 것도 없었다. 마케팅 팀이 경력 10년 차 매니저님과 나 밖에 없는 외국계 로봇회사에서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란 간단한 매장 아이디어를 내고, 랩핑 광고를 진행하고, 유튜브 영상을 찍는 것이 다였다. GA를 통해 홈페이지로 리드를 유입시키는 것도, 광고 소재를 기획하는 것 등등 실제 스타트업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준비된 마케터'의 기질은 나에게 없었다.


첫 수업, 긴장했던 탓인지 쌍 싸대기를 날려도 9시 전에는 일어나지 못하는 내가 7시 30분에 기상을 했다. 책도 읽고 생전 안 먹던 아침밥도 먹으면서 '잘할 수 있다.'라고 수십 번을 되내인 후 수업에 참여했다. 프로그램의 전 과정은 줌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전 회사에서 재택으로 일을 하고 항상 줌으로 회의를 해서인지 다행히 낯설지가 않았다. 또, 노션을 정말 많이 써야 했는데 이 역시도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미 익숙한 툴이었다 (첫 수업을 들으면서 얼마나 외국계 스타트업에서 일한 걸 감사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함께 공부할 동기들, 우리를 가이드해 줄 멘토님들의 존재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달려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양의 개인과제는 정말 낯설었다.


8시부터 밤 7시까지의 빡센 일정.

2주는 빠르게 흘러갔고 나 역시도 빠르게 피폐해져 갔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의 머리는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가고 있었고 이후의 내 삶에 대해 설렜다. 그리고 그 설렘은 팀 프로젝트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했다. 팀에서 막내가, 그리고 경력도 없는 내가 한 팀의 팀장이 되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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