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리셋하고 싶어졌다.

확신을 가졌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by 보통의 다지

다사다난했던 나의 27살도 이제 3주 만을 남겨 놓고 있다. 8개월은 외국계 로봇회사에서 마케팅 인턴으로 첫 사회생활을 경험했고, 두 달 동안은 글을 쓰면서 무너져 내린 내 정신건강을 회복하는 데 사용했으며 남은 3달은 정부지원 k-digital marketing boot 캠프에 참여했다. 그리고 현재, 해당 프로그램의 마지막 주차만을 남겨놓고 있다. 8개월간의 기나긴 인턴생활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잘 알기 때문에 큰 마음을 먹고 시작한 부트캠프. 940만 원짜리 정부지원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프로그램은 형편없었고, 매칭 된 회사에서 무급으로 일하면서 내가 하는 일이란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 콘텐츠도 물론, 이미 있었던 사진들을 재가공하는 정도.


10시에 출근해서 7시까지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하는데, 결과물은 나오지 않고 언제 집에 갈 수 있는지 궁리만 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한편으로는 속상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언제나 1등을 하는 학생은 아니었으나, 꼬박꼬박 전교 10등권 안에 들만큼 한 번 마음을 먹으면 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1명 뽑는 곳으로의 전과도, 장학금을 주는 곳으로의 교환학생 합격도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지치고 좌절했던 순간들도 많았지만 한 번도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실패라는 말속에서 반드시 얻는 것들이 있었고, 나는 더 용감해지고 강해질 수 있었다. 남들 앞에서 '이거 이상해', '안 하고 싶어.'라고 말 한마디 못하던 소심쟁이 혹은 겁쟁이가 어느 환경에서든 나의 의사를 똑바로, 하지만 예의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은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지 못하면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나의 행복을 가장 중요시 여겨서 선택한 나의 학과가, 그리고 너무 재미있었던 학부 공부를 업으로 삼고 싶어서 선택한 마케터의 업무가 더 이상 설레지가 않는다.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온달까. 마케터 역량이라고 할만한 것들 중 내가 이미 취미로 하고 있던 것들도 더 이상 재밌지가 않았고,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도 사람들과 회의를 하는 것도 기가 빨렸다.


안다. 내가 제대로 경험해 보지 않아서 그런 걸 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현직자들의 눈에는 애송이가 찡찡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또, 언제나 재미만을 따라 살 수는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소설 닷컴을 들어가 마케터-신입 채용공고를 검색한다. 역시나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그마저도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경력이 없기에 원티드는 패스,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다 결국 로켓펀치로 돌아온다. 하. 이 연봉으로 서울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2년 후 대학원을 갈 수 있을까. 불가능할 거 같다.


한참을 채용공고를 찾아보다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켰다. 오늘도 같이 동아리를 했던 몇 명의 동생들의 취뽀 소식이 올라오고 있었다. 눈물이 똑 떨어졌다. '나 괜찮은 거 맞나?' '이번 생은 망했나?' 하며 삶을 리셋하고 싶어졌다. 더 이상 나에 대한 확신도, 희망도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때, 지난주에 만났던 한 언니의 조언이 생각났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시간 낭비야.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보자."


마케터를 적게 뽑는 것, 그 마저도 신입 대신 경력을 더 많이 뽑는 것은 내 잘못도 아니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결정한 것은, 마케팅 부트캠프에서 배우길 기대하고 들어왔지만 배울 수 없었던 것을 스스로 공부해보기로 한 거다. 실업급여도 끊기고, 8개월간의 인턴을 하면서 조금씩 저축했던 돈을 꺼내 써야 하는 지금, 나는 20만 원을 투자해 1년 치 코딩 교육을 끊었다. 개발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닌, 공부를 통해 선택지를 넓히고 사라져 버린 나에 대한 확신을 다시 얻고 싶어서. 하루에 2시간씩을 투자해도 꽤 오래 걸리는 코스. 그래도 나는 GO를 할 거다. 안 해본 공부고, 그 공부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은 확실하니까.


28살의 나는 조금 더 나에게 확신이 생긴 상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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