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꺼내 쿰쿰한 옷장 냄새가 나는 겨울 외투 주머니에서 발견한 지폐 한 장보다 더 짜릿한 건 갑자기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가 속초라면 더더욱 말이다.
속초는 늘 속절없이 가는 곳이었다. 정말 이상한 마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짧다면 짧은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바다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다. 하지만 속초의 바다는 내게 전혀 다른 바다였다. 어쩌면 바다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인들은 그냥 속초에 살라고 했다. 편도로 꼬박 2시간 거리였지만, 나는 동네 마실 가듯 드나들었다. 나중엔 내비게이션 없이 강원도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웬만한 길은 이제 다 알았고, 새로 생긴 음식점이라던가 없어진 가게가 있으면 내 동네 일처럼 그렇게 궁금하고 아쉬워했다.
그렇게 온몸 내달려 속초 바다에 도착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속초의 바다는 언제나 내게 두 번째 고향 같았다. 마치 피난처이자, 안락처처럼 숨 쉴 틈을 허락해 주는 바다였다. 뜨거운 여름 햇빛에 뒤섞여 코끝에 잔잔히 나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좋았다. 매서운 겨울의 바닷바람에 두 볼이 있는 힘껏 빨개져도 그마저도 좋았다. 모래와 바다, 늘 똑같은 풍경이지만 늘 새로웠다.
특히 나는 속초의 밤바다가 좋았다. 대부분의 속초 여행도 밤바다를 보기 위함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내지만 오히려 안도와 위안을 주는 그런 밤바다. 강한 바람과 함께 떠밀려오는 거센 파도라 할지라도 수없이 내리친 파도는 날카로운 돌을 둥글게 깎아준 그런 밤바다. 눈부시게 파랗지 않아도 여전히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걸 알려준 그런 밤바다.
글을 쓰다 보니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속초 밤바다처럼 되고 싶다. 한없이 유약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견고하길 그리고 한결같기를. 수없이 내리치는 곤경과 난항 속에서도 뚝심 있게 한 곳만 내리치기를. 빛나지 않아도 여전히 가치 있기를.
머리가 아프면 늘 꺼내 먹던 타이레놀처럼 그렇게 마음이 아프면 속초의 밤바다를 하릴없이 찾나 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득 품고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속초의 밤바다를 보러 가나 보다.
때로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존재처럼 속초의 밤바다는 늘 나한테 그런 존재다. 차가운 밤바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굳이 벌거벗음을 드러내며 바다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차가운 바다 내음만으로도 나를 감싸 안아주는. 그렇게 잠식되어도 좋으니 한없이 밀려들어만 오길. 내가 가진 헛헛함을 채워주고 부족함은 씻겨 나갈 수 있도록.
금요일 밤 9시.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때, 나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건다. 목적지는 늘 그곳, 속초. 소요 시간은 2시간 10분, 막히진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파도 속으로 달려간다. 짠내 머금은 바다를 만나러.
위로받으러 그리고, 다시 단단해지러.
벌써부터 파도가 코 끝에 일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