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류의 장르적 외도
20대 초반,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영화 <오디션>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화의 잔혹하고 기괴한 묘사 때문에 B급 영화의 느낌이 물씬 나지만(물론 개인적으로 이러한 연출도 좋아한다), 그런 기괴함 속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사랑을 행하는 등장인물을 볼 수 있었고, 밀도 높은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오디션>의 원작이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독자였기 매문에 무라카미 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영화 <오디션>을 계기로 무라카미 류를 알게 되었고, 이제 하루키보다 류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 <오디션>을 계기로 무라카미 류의 다양한 글들을 읽기 시작했고, 섹스와 마약을 대하는 그의 자세나 현실에 대한 통찰력과 솔직함에 반해 지금도 꾸준히 그의 글을 읽고 있다.
보통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나 수필은 쉽게 읽히는 편이다. 일상을 배경으로 한 주제가 많고 내용도 복잡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읽은 류의 소설 중에서 읽는데 큰 에너지가 필요했던 소설이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은 <코인로커 베이비스> 와 이번 글에서 다룰 소설 <반도에서 나가라> 였다.
<코인로커 베이비스>는 코인락커에 버려진 아이들의 성장기, 무의식과 최면의 이야기, 마켓이라 불리는 디스토피아 적 SF 세계관, 동성애, 총기를 가진 혼혈아의 이야기, 마약에 관한 이야기, 로맨스, 밴드, 동성애, 감옥에 투옥된 이야기, 등등 하나의 소설 속에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밀도 있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한페이지 한페이지 읽을 때마다 큰 체력이 필요했다.
<반도에서 나가라>의 경우에는 초반부터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소설 上권 뒷부분에 등장인물 리스트가 따로 등장하는데, 물론 비중이 적은 등장인물들도 많지만, 최소 50명 이상의 등장인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려 원정군, 이시하라 군단, 일본 관료들 이렇게 3개의 세력이 등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下권 보다 上권이 더 읽기 어려웠는데, 고려원정군이 일본에 침투하는 과정과 일본의 대처를 다큐에 가까운 느낌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스타일 때문에 나는 일본의 근현대사를 읽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고 생애 처음으로 중도 포기하는 책이 될뻔하기도 했다.
반도에서 나가라는 퓨전 전쟁소설? 쯤의 장르로 분류가 가능하겠지만 장르적 분류를 떠나 결국 풍자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과 풍자로 상징되는 일본 정치인 세력, 일본 정치에 대한 풍자와 일본의 국민성에 대한 한계를 부각하기 위해 등장하는 고려원정군, 그리고 무라카미 류의 주제 의식과 환타지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이시하라 군단. 이 세 개의 세력이 주체가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반 사회에 대한 풍자이다.
그는 고려원정군을 통해 나약한 일본 사회를 비판하고, 이시하라 군단을 통해 상승 지향적이고 선진형의 고급스러운 문화만 편식한 일본 사회가 갖는 이면을 보여준다.
<반도에서 나가라>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 중에서 색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은, 그는 결국 평소 그가 다뤄왔던 주제 의식을 일관되게 주장하되, 전혀 다른 장르와 기법으로 접근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라카미 류의 소설 전부를 읽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그의 소설은 <반도에서 나가라>가 유일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그의 소설 중에서는 유일무이하다.
나는 이시하라 군단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들이 에필로그를 멋지게 장식하는 것이 제일 큰 이유이기도 하고 역시나 세 개의 새력 중에서 제일 카리스마 있었기 때문이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소설의 마지막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이시하라라는 사람을 뺀 세 사람은 술이 아니라 우롱차나 포카리스웨트를 마시면서 아무 말 없이 소파에 그저 앉아 있기만 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아니고,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고, 텔레비전이나 잡지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 상식으로 보자면 결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도, 다케노라는 사람이 가르쳐 준 것이지만, 즐겁다라는 것은 친구들과 떠들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과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즐거움이라는 것 같았다.
네 사람은 내내 묵묵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왠지 방해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이와가키는 돌아가기로 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인사하자 다테노라는 사람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일 또 와도 되나요? 방을 나갈 때 그렇게 물으니, 이시하라라는 사람이 몸을 돌려 말했다. "그건 니 자유야."
"그건 니 자유야."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지나친 획일화는 개인의 에너지를 억누를 수 있다. 물론 획일화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라카미 류는 본인부터 획일화를 지향하는 일본 문화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결국 무라카미 류는 이 소설을 통해 자유에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다.
P.S <반도에서 나가라>는 2006년 곽경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는 기사가 뜬 적이 있지만 무산된 듯하다. 소설의 방대함을 영화에 오롯이 담기란 쉽지 않았겠지만, 필자도 이 소설을 읽으며 영화화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