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회식을 하는 중에, 후배가 우리 농업, 농학의 혁신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 그것에 대한 의견 개진과 열린 토론 관련하여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런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1. 세상에는 큰 흐름이 있는 것 같다. 어떤 긍정적인 흐름이 오면 내가 하기 싫어도 따르게 되고, 부정적인 흐름이 흐르면, 반항을 해도 개인의 힘이 큰 흐름을 뒤집기는 어려운 것 같다. 좋은 학자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흐름을 바꾸기보다는 그 흐름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가게 될까를 생각하고 근미래를 대비하고 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봤다.
2. 근미래의 상황을 보게 된다면 행동을 해야 할까? 협의와 협력은 어디까지 진행해야 할까. 협의와 협력이란 공공부문의 일인데, 공공부문이란 사실 최고수와 하수를 묶어놓고 서둘러 진행하는 회의의 연속이 되곤 한다. 회의 한 번에 한 발짝 가는 일도 쉽지 않은데, 간혹 민주적 절차와 회의라는 것이 모든 의견의 중간지점에서 만나곤 한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3. 그렇다고 자유주의와 효율을 강조하는 폐쇄적 결정 구조의 기업에만 맡긴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데, 위기가 설정되고 그것을 해결하려면, 사실 이 방법만큼 좋은 것이 없다. 어찌 내가 그 안에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일을 할까. 그냥 내가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해야 행동을 하지 않을까.
4. 이러한 고민이 집단적으로 나타나고, 고상한 말로 포장되면, 우리는 그것을 Public-Private Partnership(PPP)라고 부르곤 한다. 이 두 집단이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신뢰하려면 서로 어떤 지향점인지 상호존중하고, 데이터와 산물을 중심으로 하는 물질적 교류가 가능한 신뢰 체계를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뢰할 수 있는 상호협력 시스템은 무엇일까. 그것이 농산업 발전, 아니 산업의 한 꼭지로서의 농업이 든 간에 그런 합의점이 있는 것일까.
5. 농업, 농촌을 강조하는 현재의 전략이 '오히려' 농업과 농촌을 위축시키는 것은 아닐까. 내가 대학 때 배웠던 바로, 농업은 기간산업이며 모든 산업과 생활, 심지어 우리 사회문화의 근간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것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공간이 농촌이었다. 그러나, 현대 우리나라에 농촌이 있는가, 농업이 산업의 어느 영역인가를 돌아보면 고민이 깊어진다. 결국 농업과 농촌이 구별되지 않고 다른 지역, 산업과 융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 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부가 되어 이해되고, 그 산업적 영향력을 전산업에서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6. 융합산업으로서의 농업과 농촌이라는 개념은 융복합산업, 6차 산업 등으로도 나타났었다. 그런데, 그것을 주도하는 주체가 한 부처와 기관, 집단이라면 그 목소리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큰 흐름을 따라가는 것일까? 정책은 늘 트렌드를 따라가야 성공하는데, 주장은 늘 '선도한다, 선제한다'라고 말한다. '선제적 정책'은 모순적인 말인데. 선제적인 것은 학계와 기업이 할 일인데 말이다.
7. 결국 어쩌면 세상의 고수들은 '묵언수행'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때 페북 같은 SNS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히 '텍스트는 죽어가고 있다'. 탈텍스트의 시대에 이미지로 빠르게 전달되는 세상에서 농업과 농촌을 설명하는 나레티브가 너무 길고 지루하다. 식량이란, 밥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급기야는 '굶어봐야 알지!' '위기를 당해봐야 알지!'라는 파멸적인 단어를 사석에서 종종 듣는다. 실제로 무슨 식량이 위기이고, 기후가 위기인가. 인간이 위기지.
8. 과학과 기술은 늘 중립적이다. 그 중립성이 보장될 때 활용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과학과 기술의 창발에 의도가 과도하게 개입하면 결국 다음 트렌드에서 폐기된다. 폐기되어 사장된 기술은 공장처럼 찍어내어 읽지도 않는 논문과 별 차이가 없다. 논문을 쓸데없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실용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의 무목적성을 비판하지만, 실용적인 기술이라고 개발된 것 중 목적에 부합되어 사용되는 것들은 사실 별로 없기는 매한가지다.
9. 농기업은 희망이 있는 것일까? 다수의 기업이 존재하는 생태계가 안정적인 경제적 구조를 줄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본다면, 우리 농업은 매우 불안정하다. 이것은 일본, 우리나라, 대만, (나아가 북한)이 공유하는 문제점이다. 땅이 작고 인구가 많으니 소비량은 많고 생산은 적다. 매우 간단한 문제의식의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공공부문의 역할로 메꿔 넣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아주 잠시 일본과 같은 지위를 누릴 것으로 보고 있지만, 최근 2050년 이후의 경제 예측은 불분명하다. 이 상황에서 농업의 기업 생태계 구축이 안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10. 농기업에 대한 시도는 과거에도 수차례 있었다. 그런데 왜 실패할까. 왜 포기할까. 나는 그 문제를 PPP를 구축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한다. 산업 자체가 융합적인 만큼, 그 구조도 융합적일 텐데, 융합의 목표와 그 방법이 너무 기계적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면에서 신뢰구축을 하지 못한 것일까. 농기업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자본과 경영 주체가 농업인이 되었어야 하는 것이 정답 아니었을까. 자본의 흐름에서 농업인과 비농업인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11. 2030년 그린피스가 내어 놓은 우리나라 해수면을 그린 지도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As is 상태로 진행한다면, 우리나라 서해안 많은 영역과 심지어 경기도, 서울의 일부마저 상습적 침수로 고생하게 된다. 2030년, 불과 7년 남은 기간인데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기후 예측과 농업에 대한 예측 방법을 공부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다. 이런 지도를 정확하게 그려줄 수 없나?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예상하겠지만, 정확한 예측은 사실상 세상에 없다. 세상의 모든 도표와 지도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세상을 반영한 어느 한 측면들의 이미지다. 그림을 내어 놓을 확신이 들어야 비로소 우리는 천재의 제안을 훔쳐볼 수 있다. 왜 내어 놓지 못할까. 없는 것일까, 아니면 무시당하는 것일까.
12. 결국, 마음이 맞는 사람들,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무슨 일이든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1번으로 돌아가보자. 트렌드는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세상의 위기는 없다. 인간의 위기인 것이다. 인간은 위기를 만드는 존재일 것이다. '위기=기회'인데, 이 말은 다른 뜻도 함축하고 있다. 기회는 위기를 유발하거나, 위기로 인지하게 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기회주의자를 경계하는 이유는 반드시 위기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위기'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과학이 있다. 그나마 진짜 가짜를 구별하는 검증체계로 우리는 '과학'을 발명했다. 그냥 어느 개인의 설명하지 못할 통찰력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우리는 설명가능한 체계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어야 한다. 신뢰의 기본일 것이다.
열두 달=1년이다. 12번으로 마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