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나라는 먹을 것의 종류가 풍성한 나라다
푸드트렌드, 식량 분야에 대한 고수들과 만나서 종종 이야기를 하는데, 가만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면, 다시금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왜 우리는 푸지(부사) 사과만 먹었을까?'
어제 교양과목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 중 하나다. 우리는 왜 다양성을 잃었을까?
주변적인 이야기들을 배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들어가 보려고 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절기에 따른 '절식' 문화와 유교 사상에 따른 '제사' 문화가 있다. 전통 사상의 뿌리가 깊은 농촌은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생산 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추석 전에 쌀을 내야 하고, 많은 과일들이 제사가 집중되어 있는 추석과 설날에 맞추어 나온다.
그런데,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도 '1-2인가구'가 되어버리고, 주요 식음료 제품을 온라인 구매 하는 세상에서, 직접 만들기보다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부들의 노동 강도 이슈도 있어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
전통사상이 농산물 소비 양상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였다. 특히 제사는 '죽은 자'와 '산 자'를 모두 배려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제사상의 규모와 종류는 그 가문이 얼마나 유서 깊은 가문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므로, 일정한 격식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었고, 따라서 과일은 커지고 음식은 기름지고 푸짐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모처럼 먹을 것이 부족했던 문화에서, '제대로 배 채워주는' 기회였다. 그러나, 이토록 먹을 것이 풍성한 시대에 제삿밥은 오히려 음식물 쓰레기의 양을 더욱 늘리는 상황이 되지 않나 싶다. 청년과 노년 구별 없이 '건강한 식사'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때깔 좋고 보기 좋고 풍성해 보이는 음식들은 모두 인기가 없다.
농산물 생산자들에게 이렇게 변화해 가는 농산물 소비 트렌드는 편하게 바라보기가 힘들다. 생산 쪽에서는 팔지 못해 남아돌고, 소비 쪽에서는 원치 않으니 사지 않는 현상이 누적된다. 정부가 농협을 통해서 일정량을 계속 수매해 주니, 이러한 현상은 계속될 것이다.
일부 농민들과 농업경영체는 소비자 트렌드의 변화에 주목하여, 능동적으로 농산물의 품목을 바꾸고 다양화한다. 쌀도 예외가 아니며, 사과도 예외가 아니다. 문정훈 교수를 통하여 알게 된 '그래도팜' 같은 경우에는 일부러 다양한 품종의 못난 과일들을 모아서 판매하였다. 소비자의 호응이 컸다고 생각한다.
'잘 사는 나라'란 무엇일까?
먹을 것이 풍성한 나라도 그중 하나다. 식재료가 풍성해서 다양한 형태와 종류의 식사가 가능하고, 그렇게 해서 외식업이 발달하고, 그렇게 성장한 호텔 등의 고급 비즈니스도 활발해지고, 소비자들의 다양한 취향이 만족되는 나라일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 먹는 것 하나하나까지 살아 숨 쉬는 그런 나라.
우리는 아직도 먹을 것의 '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다. 농촌의 농민이 가난하다고 믿고 있으며, 소득이 낮다고 전제한다. 품질이 어떻든 종자의 종류가 무엇이든 상관치 않고, 그냥 과거 그대로 일하고 노력의 여하를 묻지 않고, 생산자 중심으로만 생각해도 그냥 불쌍하게 쳐다본다.
어쩌면, 우리는 농민을 볼 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바쳐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 공부시켜 성공시킨 어머니. 그 어머니는 오늘도 밭에서 일군 감자와 배추를 아들에게 보낸다. 그런데, 아들은 전화한다. '어머니, 그만 좀 보내세요. 집에서 썩고 김치 담글 사람도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누가 감자를 깎아서 먹어요. 시장에서 다 씻어서 다듬어 나온단 말이에요. 애엄마도 직장에 다녀서 시간이 없어요.'
어머니는 골방에서 혼자 잠들고, 그래도 할 줄 아는 것이 농사뿐이라, 사랑을 표현할 다른 방도가 없다. 썩어서 버리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아들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한 번은 내려가서 난리를 쳤다. 그만 좀 농사짓고 편히 좀 쉬라고. 극구 땅을 갈던 어머니가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좀 이상하시다. 이제는 정말로 농사를 못하시겠다고 한다. 그런데, 땅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신다. 그 조그만 땅뙤기에 얽힌 수많은 것들 중에는 아들 녀석이 뛰어다니며 신던 조그만 고무신도 있다. 그 땅에는 차도 못 들어간다. 아들은 그 땅 가지고 뭐 하냐고 한다.
우리가 농산물의 '질'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그 내면에는 어쩌면, 아직도 어머니의 땀과 눈물이 서려져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저 배불리 먹이려 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농산물에 베어져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또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의 고향은 서울이고, 농촌은 그저 다른 도시를 지나가는 사이에 있는 '공백'이다. 심지어 도시 간 고속도로는 그나마 지나갈 일 없는 농촌을 아예 쳐다볼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도시는 오픈되어 있으나, 시골은 점점 하나둘 고립되기 시작했고, 농촌이 농업 생산 지역이라는 오래된 생각은 궁극적으로 소비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푸지' 밖에 못 먹었다.
푸지 사과를 가지고, 사과 카레를 만들면 어떤가? 사과잼은 또 어떨까? 사실 푸지 사과는 조선 시대에는 없었다고 한다. 유입 종이니까. 제사도 제사 나름대로 당시의 트렌드를 읽어 주는 최신의 공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제사상은 획일화되고, 그것은 오히려 다양성을 훼손했다. 제사상이 담당하던 공간은 '신선배송'을 하는 온라인 마트가 담당하기 때문이다.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디커플링'은 그것을 매개하는 유통업자와 관리를 담당하는 정책과 법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을 어떤 특정 정치적 성향으로 몰아가는 요즘의 이야기도 못마땅하다. 쌀이 그 첫 번째일 뿐, 그다음에는 김치 작물, 과수, 축산물 등 연쇄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 상황을 방치하면, 우리는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는 '품질'과 '맛' 등의 가치 중심 사고가 발달한 소비자가 외면한 농산물을 굳이 세금을 충당해 가며 생산하게 된다. 그 세출의 규모가 얼마나 될까?
난 농식품 경제, 경영, 소비자, 정책 연구자들이 이런 부분에서 더 많은 근거와 연구를 해 주길 바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