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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지 Jun 16. 2020

영양사의 고백

메뉴를 짤 때 고려해야 하는 1순위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다면 거의 가지고 있는 영양사 자격증. 나는 그 자격증을 따기 싫었다. 나중에 영양사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학교를 다닐 때도 영양사 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과목을 필수적으로 듣지 않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만을 찾아들었다. 그렇게 4학년 때쯤 응시 필수과목 학점이 부족해서 응시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내 계획대로 영양사가 될 확률은 0%였다.


그러나 지금 나의 유일한 경력은 영양사다. 주위에서 마지막 기회니 노후에라도 일할 수 있는 대책으로 자격만 얻어두는 게 어떠냐, 아깝다는 속삭임에 남은 9학점을 채워 들었고, 추운 겨울날 영양사 시험에 합격했다. 타이밍이 맞게도 졸업과 동시에 실습하던 회사에서 영양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르쳐줄 사수도 없고, 전문성도 없었으며 가장 중요한 의지력도 부족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영양사가 되기 싫었던 영양사였다.


요리는 좋아했지만 집이나 아르바이트에서 해본 게 전부였고, 단체급식에 관련된 공부는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에 나와있는 식단표를 참고해서 급하게 메뉴를 짰다. 초록색 검색창에 제철 메뉴, 레시피를 수도 없이 검색하고 단체급식 관련 카페와 사이트를 찾아 뒤적거렸다. 매주 짜는 식단표는 나에게 숙제 같은 존재였다. 그 숙제를 해결하면 1인당 양을 계산해서 빠짐없이 재료와 손질 방법을 고려하여 발주했다. 처음엔 그 양을 제대로 잡지 못해 음식이 부족하거나 남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렇다면 영양사가 메뉴를 구성할 때 고려해야 할 1순위는 무엇일까?




영양사가 메뉴를 구성할 때 중요한 것은 영양적인 측면보다 ‘단가’다. 정해진 식단가 내에서 인건비와 운영비를 제외하고 남은 돈으로 식재료를 구매해야 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렇다고 해서 싼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아무리 영양적 측면이 높은 식재료라 하더라도(전복 등) 식재료비가 넉넉하지 않으면 식탁에 오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영양학적 기준에서 식재료를 고르되, 그중에서 단가에 맞는 식재료가 최종 선택되는 것이다.


재료의 전처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앞 전의 두 가지 요소를 충족했다고 하더라도, 조리 과정 중에 손이 많이 가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패스. 조리사님의 불평과 음식을 먹는 고객의 반응이 바로 나오니 영양보다는 어느새 편의성과 기호성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처럼 메뉴를 구성해야 할 때 고려해야 할 측면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양적인 부분은 공부도 생각도 많이 미흡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영양사라는 이름에 맞게 영양적인 측면에서 집중하여 더 공부하고 읽고 신경 쓰고 싶다. 사실 고백하자면, 영양사로 일했던 지난 시간 동안 나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등을 일일이 고려해서 메뉴를 구성한 경험은 없다. 단지 적당한 단백질을 가진 음식과 채소들을 배합하여 메뉴를 구성했고, 제철요리와 기호도, 조리법, 반복되는 재료 등이 겹치지 않게 메뉴를 배치했을 뿐이다. 나름 전문직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지만 그에 합당하지 않은 대우와 무시,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전문성 등 복합적인 이유로 영양사로서 지속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원하지 않았던 영양사의 경험도 생각만큼 나쁘진 않았다. 결과가 바로 느껴져서 상처받는다는 단점도 있지만 좋은 결과라면 더욱더 힘을 내서 일할 동기를 얻고 행복할 때도 많았다. 다른 이의 식습관에 관여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막중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책임감보다는 영양사와 다른 품질관리를 병행하면서 내가 해결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에 더 집중했다. 중요한 사실은 영양사에겐 고객(먹는 사람)이 1순위라는 점이다. 어떤 영양사도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이나 맛없는 음식을 제공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만족할 수 있는 식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영양사에게 가장 힘이 되는 한마디는 ‘잘 먹었습니다’입니다. 거기에 만족스러운 표정까지 선물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 말 한마디로 인해 무리해서라도 맛 좋은 음식들을 내고 싶은 힘이 생깁니다.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영양사 분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맛있고 건강한 음식 감사합니다.

*햇병아리 (전) 영양사의 글이니 미숙한 부분은 이해하시고 재미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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