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녹차도 좋아하게 된 건가?
언젠가부터 초록 인간이 되어버렸다.
눈에 짚이는 초록색 물건을 모으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나까지 초록으로 물들이고 있다.
초록 가방, 초록 스웨터, 초록 목도리, 초록 장갑, 초록 운동화.
즐겨먹는 것에도 초록이 많이 늘었다.
대표적으로 녹차,
녹차 맛은 어떤 간식이든 좋다.
이러다가 내 겉과 속 모두
초록색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언젠가 우리 학교 상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은 자신의 심리 상태에 따라 끌리는 색이 달라지고,
지금 내게 부족한 부분을 색깔을 통해 채우려 한다고 하셨다.
초록색은 평화, 성장, 재생을 상징한다고 한다.
지금의 나에겐 이러한 초록이 필요한가 보다.
일단 중학교 때는 초록색을 정말이지 싫어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체육복이
당장이라도 농활을 가야 할 것만 같은,
상하의 모든 부위가 빠짐없이 초록색인
촌스러운 체육복이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여학교를 다녔던 지라
언니들과 체육관을 함께 사용했는데,
언니들의 체육복은 우리와 같은 디자인의
보라색 체육복이었다.
‘초록’한 우리와 ‘보라’한 언니들을
여러 차례 번갈아 바라보면서,
우리는 애증을 담은 하나의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땅에 우리 학교를 세우기 전에,
이곳은 분명 고구마 농장이었으리라.’
초록색이 싫던 그 시절의 나는 아마
초록이 필요하지 않았나 보다.
평화, 성장, 재생이 필요하지 않은 삶이라니,
어쩌면 생동하는 봄 자체인 그 시절엔,
이미 마음속에 초록을 품고 있어서 그랬나 보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연인이 되고 싶다는
농담 섞인 소망이 홀연히 내 안에 들어섰다.
내 마음을 쉬게 해줄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고,
이는 머릿속에 막연히 녹음을 떠올리게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대학 입시상담을 하는 중,
선생님은 내게 도서관 사서 말고
되고 싶은 다른 것은 없는지 물으셨고,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환경운동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당시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황스럽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성인이 된 저는 참 다행히도
사서가 되었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그 당시 나에게 초록은 자연,
아니 어디론가의 도피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초록을 다시 내 안에 품을 수 있을까?
일단 1번 방법은,
녹차 맛의 간식을 입에 집어넣는 것이다.
2번부터는 이제부터 찾아 나가기로 다짐해 본다.
개구리가 좋아졌고, 공룡이 좋아졌다.
나뭇잎이 좋아졌고, 새싹이 돋아나는 봄이 좋아졌다.
청량한 민트 맛 아이스크림도 좋아졌고,
눅진한 녹차 맛 초콜릿도 좋아졌다.
하나의 색을 좋아하게 되니, 사랑하게 된 것이 꽤나 늘었다.
만약 모든 색깔을 좋아하게 된다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다음엔 어떤 색을 좋아해 볼까?
세상의 모든 빛깔을 사랑해 보기로 다짐해 본다.
언젠가는 나도 빨간색을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올까?
검색해보니 빨간색의 상징은 열정과 에너지라고 한다.
그리고 빨간색과 초록색은
색상환의 반대쪽에 위치한 보색 관계이다.
그렇다면 필시,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과 지금의 나는
상극이리라.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을
당분간 피해 다녀야겠다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다짐해 본다.
...
검색결과를 다시 읽어보니,
보색은 서로 대비되지만 조화시키면
화려하고 생동감 있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한다.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과한 후,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과 친해져 보기로 다짐해 본다.
어릴 때 피망을 참 싫어했는데
초록색을 좋아하는 지금,
여전히 난 피망이 싫다.
녹차는 단순히 맛이 좋아서 좋아하게 된 듯하다.
내 안의 쓸데없는 작은 궁금증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