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대학생때부터인 것 같다. 주로 밤에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뭔가를 하던 버릇이 생긴 것은. 시험기간에는 낮에 시험을 보고나면 남들이 다음 과목 공부하는 동안 일단 자고 일어나 혼자 밤을 새서 공부를 하고 아침 일찍 친구들을 깨워주는게 내 임무였다.
낮시간이 여유가 있게 된 지금도 여전히 일을 미뤄 놓았다가 신데렐라도 아닌데 자정이 되면 뭔가를 시작하게 되는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
이렇게 조용하고 어두운 밤에 음악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오늘은 그런 밤이다. 어린시절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같은 심야 라디오 방송을 듣던 버릇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입담좋은 이택림과 같이 하던 공개방송도 재미있게 들었는데 이 기억에 공감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나이가....) 당시 라디오방송에서는 어디에 사는 누구씨 라고 사연을 소개를 해 줬는데 요즘 방송에서는 이름대신 1234번님같이 휴대폰 번호 4자리로 불리운다. 누군가가 이렇게 번호로 불린다는 것이 조금 슬프다.
지금은 Youtube를 검색하면 쉽게 각 주제에 맞는 음악들을 들을 수 있는 편한 세상이다. 카페 뮤직같은 고정 채널도 있는데 혹시 밤에 들을만한 재즈라는 주제를 찾아보니 Beautiful night jazz라는 제목으로 두시간이나 나온다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옛날 사람인 나는 이렇게 쉽게 듣는 음악보다 오늘은 내가 DJ가 되어 보기로 한다.
오늘은 밤에 들으면 좋을 재즈를 찾아보기로 하고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CD장에서 앨범 제목에 night라는 단어가 들어간 CD를 찾아서 꺼내본다.
오...생각보다 여러장이 나온다.
시대순으로 보면 Round about Midnight at the cafe Bohemia (Kenny Dorham, 1524) - 화려하지는 않지만 간결하고 그루브한 Dorham의 트럼펫 연주가 일품. Midnight Blue (Kenny Burrell, 1963) - 약간 블루스적인 재즈 기타 연주의 필수 감상 음반 Night Lights (Gerry Mulligan, 1963) - 서부지역의 유명 연주자들과 Mulligan이 피아노, 테너색스폰, 클라리넷을 연주한 West coast jazz의 명반. 앨범 재킷의 그림처럼 60년대 도시의 밤에 어울릴만한 로맨틱한 음악들. Al Di Meola, John McLaughlin 그리고 Paco de Lucia 3대 기타리스트의 명협연 라이브 Friday Night in San Francisco, 1981 live album - 기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들어야 봐야 할 라이브 명반. 세명의 연주자가 어느 위치에 앉아있는지 헤드폰을 끼고 찾아보는 것도 재미. Silent Night (Chet Baker, 1986) - Baker의 트럼펫으로 듣는 크리스마스 앨범 You and the Night and the Music (Helen Merrill, 1998 ) - 블론디 재즈 보컬의 대명사인 Merill 매력적인 목소리. 아마도 앨범 타이틀이 이 글의 주제 O時의 Jazz (1998) - 유명한 CBS jazz 라디오 방송 One Quiet Night (Pat Metheny, 2004) - 설명이 필요없는 Metheny의 발라드 연주곡 An intimate evening-Jazz mood "Music that makes the moment" (2000) - 연수중 Santa Monica 집근처 윌셔가에 있던 중고 CD가게에서 건진 3장으로 된 compilation CD. 각 CD의 제목은 Dinner by candlelight, Jazz by the fire, Jazz at night's end로 모든 곡이 좋다.
모든 앨범이 각각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오늘 밤에 듣기로 한 것은 베이스연주자 Charlie Haden의 두개의 앨범이다. 유일하게 나의 컬렉션 중에서 밤을 주제로 한 앨범이 두개나 있는 연주자이기도 하지만 음색 자체가 밤과 너무 잘 어울리는, 특히 도시의 밤에 잘 어울리는 베이시스트이다.
Night and the City (1996)는 Piano의 Kenny Barron과 뉴욕 브로드웨이의 Iridium Jazz Club에서 라이브로 연주한 앨범이다.
전형적인 미국적인 재즈피아니스인 Barron의 명료하고 건조하면서도 로맨틱한 연주를 부드럽고 여유있는 Haden의 베이스가 잘 받쳐주면서 두개의 악기만으로로도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연주를 들려준다. 숲속을 캠핑을 가서 재즈들 틀어놓고 들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 역시 재즈 하면 현대적인 도시의 밤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클럽이나 아니면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서 하늘로 쭉 뻗은 빌딩들의 라인과 화려한 불빛의 야경을 보면서 라이브를 감상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이 앨범은 제목처럼 이런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앨범이 아닐까 싶다.
뉴욕의 빌딩에서 스카이라인을 보면서 듣는 것은 아니지만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서 창밖으로 가끔 지나가는 차들의 불 빛에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연주 사이사이에 들리는 박수소리에 나도 따라 치면서 뉴욕의 클럽에 있는 것을 상상해본다. (그런데 뉴욕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Nocturne (2000)은 아주 독특한 앨범이다. Charlie Haden (Bass), Gonzalo Rubalcaba (Piano), Ignacio Berroa (Drums), Joe Lovano (Tenor Saxophone), David Sanchez (Tenor Saxophone), Pat Metheny (Guitar), Federico Britos Ruiz (Violin)
재킷 사진에서는 큰 현대의 도시의 거리가 아닌 조금은 허름해보이는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선 남미의 안개낀 밤 거리에서 클럽들과 오래된 자동차들이 서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앨범에서는 대부분 남미의 춤곡 Bolero를 재즈형식으로 연주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라틴스럽지도 않고 적절히 현재 재즈적인 방식으로 감미롭고 세련되지만 어딘가 우수에 젖은 연주를 들려준다.
Haden이 발굴해 소개한 쿠바의 피아니스트 Rubalcaba는 Barron과는 다른 진중하고 감각적인 음색의 피아노 소리를 가지고 있다. Contigo en la Distancia와 같은 곡에서는 솔로 파트에서 What a difference day made와 같은 다른 곡의 선율을 일부 변형해서 사용하는 센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두 명의 걸출한 연주자외에도 참여한 사람들의 역할이 이 앨범을 특색을 형성하는데 중요하다.
Haden과 여러장의 앨범을 같이낸 Matheny도 Noche de Ronda에서 아주 세련된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 바이올린의 Ruiz는 전형적인 라틴 바이올린 연주의 정수로 음악적 분위기를 한껏 나타내준다. 또 드럼연주 외에도 콩가소리가 라틴의 색을 더해준다.
자, 이제는 안개가 살짝 낀 밤에 아바나의 어느 길거리의 바에 앉아서 Bolero를 듣는 상상을 해보자.... 역시 뉴욕과 마찬가지로 쿠바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말하는 것 처럼 직접 가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피곤하고 기대와 다를 수 있다. 그저 이런 밤에는 음악과 나즈막하게 들을 수 있는 작은 오디오, 그리고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