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했다.
실험결과가 기대와는 반대로 나와버렸다. 후보치료물질을 투여한 군에서 더 심해졌다.
다음주 부터는 뭘하나...
실망감과 함께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오늘은 환갑은 되어보이시는 성격 좋게 생기신 기사님이시다.
출근할 때 영하의 날씨에도 차안의 담배냄새 때문에 창문을 열고 학교까지 왔어야 했던 택시와 달리 오후에는 기사님처럼 차량도 깨끗하다.
추운 날씨를 화제삼아 이야기를 시작하신다.
이때 라디오에서 경력단절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가 기사님께서 갑자기 목소리 톤이 높아지신다.
여성들 경력이 단절이 안되게 하려면 나라에서 아이를 맡기고 일을 할 수 있게 책임지고 시설을 마련해줘야지, 경제수준에 관계없이 10만원씩 누구에게나 보육수당을 준다고 해서 일을 할 수 있겠냐고 열변을 토하신다.
나도 격하게 반응하며 택시안에서 가장 말을 많이 한 날이 되었다.
이분은 상당히 시사에 밝으신 분이고 생각도 깊이 하시는 것 같다.
아이 돌봄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하신다.
유치원도 2교대로 선생님을 운영해서 아침 일찍부터 오후 늦게까지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게 해야 실질적으로 일을 지속할 수 있다고 하신다.
옳으신 말씀.
게다가 아픈 아이들에 대한 대처가 부족하다는 문제점도 지적하신다.
부모가 아픈아이를 약과 함께 유치원에 밀어놓고 가면 그 다음 관리가 안된다는 것이다. 아픈애들을 따로 방에 모아서 관리를 해야지 그렇게 안하니까 병이 옮긴다고 하시면서 제대로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아마도 보건학쪽에도 의외의 식견을 가지고 계심에 분명하다.
요즘같이 독감이 유행함에도 관리가 안되는 우리나라의 보건당국을 향하는 일침 같기도 하다.
이어서 주제는 청년 실업 문제로 넘어갔다.
취업을 위해서는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게 중요하므로 제조업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서 취직할 자리를 만들어 줘야지, 역시 모든 사람에게 돈을 뿌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초등학생들도 아는 기본 원리를 왜 정부에서 모르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신다.
마지막 이야기는 세비를 21.15%올린 완주 군의원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같이 흥분해야 하지만 정작 내 머리속에서는 나도 월급을 21.15%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적극 맞장구를 치다보니 어느덧 기차역에 도착했다.
기사님 덕분에 실험을 망친 우울함이 싹 가셨다는 것에 감사를 드리며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에 이 분 의외로 허당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미터기를 안누르고 오셨단다.
허허 참 하고 시원하게 웃으시면서 쿨하게 5000원을 찍어 영수증은 내주신다.^^
감사합니다 하고 내리는 순간 다시 칼바림이 귀를 때리고 지나간다.
플랫폼에 내려가 기다리는데 출발시간이 지나도 차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무슨일인가?
10분 연착한다는 안내. 날씨가 너무 추워서 KTX도 힘든가 보다.
바람은 더 차가워져서 몸을 떨다 보 눈앞에 보이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귀마개용 헤드폰을 꺼내 쓰고, 해가 지는 겨울 오후에 어울리는 음악을 머리속에서 찾아본다.
겨울이지만 풍경은 겨울답지도 않고 황량한 바람만 부는 기차역...
차라리 눈이 하얗게 쌓였다면 덜 추웠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Flight to Denmark>라는 앨범 사진이 떠올랐다.
사실 이 CD는 눈이 소복히 쌓인 숲속에 서 있는 Duke Jordan의 사진으로 되어있는 앨범 커버만 보고 샀던 것 같다.
인기를 잃어 60년대 뉴욕의 택시기사로 살아가던 Duke가 덴마크로 넘어가 처음 냈던 이 앨범으로 극적인 재기에 성공했었는데, 그 주인공이 아주 추울 것 같은 숲속에서 춥지 않게 느껴지는 그 사진을 떠 올리며 유튜브에서 검색을 했다.
뭘 들을까?
눈에 띈 제목은 <Glad I met Pat>
옆집에 살던 소녀를 보고 만든 곡이라는데 가볍고 경쾌한 피아노 인트로에 이어 드럼이 들어온다.
간결한 Duke의 연주가 돋보이는 이 곡을 택시 기사님을 만나 즐거웠던 마음으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