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부부의 서울 신혼살이

2개월의 여행 혹은 일상

by 재치

얹혀 지내고 있던 채연이네 집에서 독립해 회사 근처 양재에 방을 구했다. 집값이 어마장장했지만 근 1, 2년은 남편의 방학마다 함께 지내야 하는 공간이었기에, 두 집 살림에 빠듯했음에도 가용 예산 최대치를 투자해 10평 정도 되는 구축 원룸으로 구했다. 우리의 서울 보금자리는 결혼하면서 되려 떨어져 지내는 우리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닮아, 그 역시 양면적이었다. 남북 방향으로 각각 나있는 통창은 언제고 탁 트인 풍광을 선사해 줬지만 단열이 되지 않는 탓에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으며, 근처 역까지 걸어서 15분은 족히 걸리는 애매한 입지였지만 양재천만큼은 걸어서 2분이면 갈 수 있었다.


쨌거나 서울집을 구하고, 교사인 남편이 겨울방학을 맞이하면서 그제야 우리는 잠시나마 합칠 수 있었다. 2개월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격주로 서울, 제주를 오가며 이삼일 정도씩 보던 생활을 멈추고 느긋히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떨어져 지내고 있던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제주 토박이던 우리의 서울살이는 여행 같은 구석이 있었다. 우리는 제주'섬'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부지런히 찾아 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방한한 해외 뮤지컬을 보고, 강원도로 당일치기로 스키를 타러 다녀왔다. 또, 버스 타고 15분 정도를 부러 가서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곤 했다. 방학 때에만 둘이서 지내는 우리에게 회원권을 구매해야 이용할 수 있는 코스트코는 그다지 메리트가 없었지만, 코스트코에서 사 먹는 불고기피자와 층층이 적재돼 있는 물건들 눈요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함께 아카펠라 동호회에 가입도 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바삐 일상을 살아가던 나와는 달리, 남편은 서울에 지인이 없어 종일 방에서만 지내느라 무료해했는데, 서울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취미 활동도 할 겸 소모임에 참가하기로 한 것이다. 나도 그를 따라 아카펠라 동호회 모임에 참가를 했고, 생각보다 즐거웠던 경험에 우리는 이후에도 간간히 연습모임에 참여했다.


우리가 서울에서 가장 즐겨했던 데이트는 두 발로 서울 곳곳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러 양재집에서부터 고속버스터미널역까지 걸어가고, 아카펠라 동호회 모임이 끝나면 사당역에서 양재집까지 걸어오곤 했으며, 따릉이를 타고 무작정 신논현역에서부터 이태원 인근까지 주파한 날도 있었다. 나는 신기한 간판들 또 사람 구경에 정신없어했고, 남편은 부동산앱으로 이따금 집값을 확인하며 '이 아파트 사주면 나도 서울로 올라올게.'라는 웃픈 농담을 던졌다. 그 해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는데, 그와 함께 온갖 주제로 수다를 떨고 걷고 있노라면 매서웠던 공기도 상쾌한 질감으로 변모하곤 했다.




즐거운 이벤트가 넘쳐나는 서울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우리는 일상 역시 살아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연인이었을 때처럼 함께 뛰었다. 양재천'세권'이 아니던가. 제주에서는 주로 차도 옆 인도를 우리 둘이서만 달렸는데, 러너의 성지인 양재천에서는 수많은 러너들과 함께 달렸다. 한밤중에도, 눈이 내리는 날에도 양재천에는 언제나 뛰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번잡하다'의 동의어라 생각했는데, 양재천에서 마주친 수많은 에너지만큼은 언제나 기분 좋은 활력이 되어주었다.


또, 우리는 자주 요리를 해 먹었다. 그 시절 요리사는 남편이었다. 당시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기도 했고 요리 실력도 그가 훨씬 출중했으니. 그는 본격적인 요리를 위해 열 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 보조 조리대도 들였다. 그가 그의 원룸 자취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 걸 본 적이 없어 가구가 생긴다고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을까 의아해했었는데, 그는 식탁이 들어오고 나서는 정말 날개를 단 듯 요리를 했다. 제육볶음, 카레와 같은 일상적인 음식은 물론이고, 갈비찜, 연어장, 아구찜, 마제소바 등등 집에서 해 먹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음식도 척척 해냈다. 일을 마치고 그가 차려놓은 저녁을 함께 먹을 때면, 음식이 식어가는데 퇴근이 더 늦어질 거냐는 그의 귀여운 채근을 들을 때면 나는 새삼 그가 나의 식구이고, 나의 가족임을 실감했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부터는 나는 남은 날의 수를 입 밖으로 세지는 않았다. 하루, 하루가 귀한데 불안과 초조로 그 하루들을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정돼 있으니 하루, 하루 더 소중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최면도 걸면서. 그렇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시점에서 드는 생각은, 정말 그러했기에 내가 2년 전의 일들을 또 그 감정을 이렇게나 소상히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여행인 듯 또 일상인 듯 보냈던 2개월의 시간은, 우리가 진짜 가족이 되기에는 결코 모자라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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