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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학생도우미를 했던 아쉬운 경험

by 하루

대학생 때 나는 장애학생도우미를 하고 있었다. 사실 선한 의도로 한 것은 아니었고 학비를 벌기위한 수단으로 장애학생도우미를 했었다. 시급도 괜찮았고,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대학교 내에서 하는 일이라 거리도 가까워서 지원하게 되었다. 휠체어를 타던 친구를 도와주는 일을 1년 정도했는데, 나중에는 돈을 굳이 안 받더라도 종종 도와주게 되었다. 담당했던 친구외에도 종종 장애학생지원센테에서 요청하던 다른 일들도 도와드리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각장애학생을 도와 줄 수 없겠냐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장애학생 지원센터 담당선생님께서 시각장애학생을 보필할 학생이 사정이 생겨서 급히 사람이 필요했었다. 방학기간 중 계절학기를 듣던 그 학생을 교실까지 이동하고, 학업을 도와줄 학생이 필요했다. 나는 흔쾌히 하기로 말씀드렸다. 그때는 돈보다 몸이 불편한 다른 학우를 도와주는 것에 좀 더 무게를 뒀던 선택이었다.


다만, 실제로 학생을 도와주려고 보니 함께 이동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수업을 알려주는 것은 참 쉽지 않았다. 당시 그 학생이 듣는 수업은 이과 수업이었는데, 미토콘드리아에 대해서 교수님이 설명하시면 이를 내가 손바닥에 미토콘드리아 그림을 그려서 알려주어야 했다. 처음 만난 학생의 손바닥에 미토콘드리아를 그려주는 것은 참 쉽지 않았으며, 더욱이 나 스스로 과학적 내용에 대해 설명하기는 더 어려웠다.


시각장애학생은 종종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그 부분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좀처럼 내가 모르는 과학 이야기를 손바닥에 그리고 설명하는게 싶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교수님에게 수업 중이나 마치는 중에도 질문을 하였다. 당시 내가 질문을 할 때면 그 교수님은 나에게 다소 화를 내셨다.


"넌 질문하면 안되고 듣기만 해야지! 너가 수강하는게 아니잖아!"


교수님 말씀도 일리는 있었다. 나는 단순히 도와주는 학생이기에 수강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되긴했다. 그러나 시각장애 학생에게 그 내용을 설명해주는 내 입장에선 참 당혹스러웠다. 문과생인 내가 이과 수업을 알려줘야하는 사실이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간 서럽기도 했는데, 시각장애학생을 위해 방학 중에도 내 시간을 할애하려 도와주려는 내가 어쩌면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이러는게 맞나 싶었다. 나 나름대로 우리 집에서는 귀하게 자란 사람인데 너무 서러웠다.


그때는 많이 어려서 그런지 교수님이나 그 시각장애학생 모두에게 서운함이 없진 않았다. 나의 설명에 답답해하던 그 시각장애학생도 나에 대해 그렇게 좋게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그 계절학기의 도우미 활동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단 그렇게 보람이 되진 않았던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길로 그게 장애학생도우미를 한 마지막 학기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수업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있었다. 우선 생각해보면 시각 장애학생을 위한 보조자료가 왜 없었을까 싶었다. 만약 미토콘드리아를 비롯한 수많은 자료에 대한 보조자료가 있었더라면 학생이 조금 더 수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수월했지 않았을까 싶었다. 분명 교수님도 시각 장애학생이 수업을 들을 것을 알았을테지만 시각 장애학생을 위한 별도의 보조자료나 설명을 위한 도움을 제공하진 않았다. 유퀴즈에 나온 시각장애인 이순규 애널리스트의 사연을 들어보면 과거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어떤 식으로든 시각장애 학생인 자신을 위하여 보조자료며 함께 참여할 여러가지를 도와주었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도움이 거의 없다시피 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에 대한 교육이 부족했지 않나 싶었다. 당시 급하게 투입된 것도 있겠지만, 시각장애학생을 위해 해야하는 것들에 대해서 별도의 교육도 없이 도와주다보니 시각장애학생에게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진 못했던 것 같았다. 내 스스로의 전문성이 없다보니 그 학생과의 시간이 서로 참 많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나는 단순 보조에서 내 역할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시각장애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수업을 설명하는 등이 내가 예상했던 나의 역할과 많이 달랐었다. 물론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예컨대 시각장애학생을 위해 보조자료를 만든다던지 등의 노력을 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들긴하는데, 한편으론 굳이 내가 그렇게까지 하는게 맞는가 싶기도 하다.


그 해 시각장애 학생도우리를 한 경험은 솔직히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그때의 경험 이후 장애학생도우미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부족함으로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스스로 불편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게 썩 맞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시각장애학생, 혹은 다른 몸이 불편한 학생들을 위해 대학들이 어느 정도나 제도를 마련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사회가 장애학생을 포용할 만큼 여유가 있는지도 아직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그런 봉사활동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진, 나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기에 나 조차도 참 그런 점에서 부끄러움이 많다. 종종 거리에서 마주치는, 때론 미디어매체에서 마주치는 몸이 불편한 누군가를 보곤 하는데, 과거 대학생활 때나 지금이나 장애인을 위한 제도 개선이 그렇게 많이 된 것 같진 않아 안타까움도 많이 느끼곤 한다.


유퀴즈에 나온 시각장애 애널리스트도 결국 미국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을 떠올려보면, 과연 한국에서도 시각장애 애널리스트가 나올수 있을까에 의문 부호가 들곤 한다. 고등학교면 대학교 모두 여러 면에서 아직은 한국은 장애학우를 위한 지원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졸업 후에는 어떨까.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어서, 본인이 여러 취업 전선에 제한이 있고 차별적인 대우도 존재한다는 것을 종종 듣곤한다. 나 역시 그렇게 적극적으로 제도 개선한다며 참여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안타까운 마음만을 가지고 지켜보곤 한다. 시각장애 애널리스트 이순규씨를 보면 옛날 생각이 들었고 그 분이 미국에서 그렇게 된 이유, 본인 스스로도 대단하시지만 아직 한국은 그런 시스템이 많이 부족하지 않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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