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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으로 환산되지 못했던 것들

by 하루

필자는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가끔 고기를 먹다가 흠칫할 때가 있다. 내가 방금 막 굽기 시작한 이 고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소의 살과 근육이었을 것을 떠올려본다. 고향 집에서는 소를 키우는데, 소 사료를 주고 하다보니 소에 대한 애정이 생겼던 것 같다. 쌍꺼풀 짙은 눈망울과 덩치는 산만하지만 겁도 많은, 그러면서 호기심은 많아서 무조건 한번은 혀로 햝아보는 소들을 보고 있자면 강아지 다음으로 가장 귀여운 동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소의 엉덩이, 허벅지, 혹은 두툼한 살덩이를 내가 앙하고 물어본다고 생각하니 거부감이 들었다. 특히 육회는 내게 살아있는 소의 살을 내 도드라진 앞니로 살아있는 소의 엉덩이를 꽉 그냥 물어버리는 모습이 연상되어 더 거부감이 들었다. 식용 한우를 키우는 집의 아들이 채식주의를 생각하는 아이러니가 가끔 이렇게 생긴다. 그래서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에 약간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한 5초 정도하고 곧 이어 잘 구운 소고기를 너무 맛있게 먹곤 한다.


그래도 고기라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 같다.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고기를 포기하는 건 참 쉽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소나 돼지, 닭 등의 생명이 한 때 깃든 살을 섭취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하는 듯했다. 교회에서 식전기도를 하곤 하는데, 하나님께서 일용한 양식을 주신 것에는 어쩌면 이런 생명의 가치에 대한 일종의 고마움도 잊지말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한 때 살아있던 생명을 섭취할 수 있는 것에는 풍분한 영양분과 맛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근데 생각해보면 비단 고기만이 감사해야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쾌적한 카페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는 것도 알고보면 누군가가 바닥을 깨끗이 닦았기 때문일 것이고, 밥 한공기에도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늘 담겨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흔히 재화를 지불했기 때문에 고기라는 생명의 소중함도, 누군가의 수고로움이 빚어낸 카페의 청결과 밥 한공기에 대해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갑질, 내가 대가에 대해 이만큼 돈을 냈으니 화를 내는게 당연하다는 식의 사고가 합리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재화로 지불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해보지 않는 게 만연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아덤 스미스는 "우리의 식탁에 매일 빵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요리사의 이타적인 마음이 아니라 돈을 벌려는 이기적인 욕심들이 만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현대 경제학은 이를 굉장히 신봉했고, 자본주의가 주류가 된 현재는 모두들 제품이나 상품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면 그 이면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수고로움에 대해서는 더 깊게 생각지는 않는 듯하다.


그래서 필자는 아덤 스미스의 생각이 꼭 옳지 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식탁에 매일 빵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요리사의 이기적인 욕심도 있었겠지만 이타적인 요리사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타적인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기에 최소한의 감사함이라도 가져야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고기를 먹을 때도, 바닥을 닦아주시는 카페 종업원에게도, 밥 한공기를 퍼다 주시는 아주머니에게도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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