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왜 불공평할까?

by 하루

친한 지인과 어쩌다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누구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삶이 이렇게 불공평한 건 교회의 하나님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지인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삶이 이렇게 불공평할 수 있냐고 했다. 진지한 이야기는 사실 최근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주변 지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나왔다. 함께 대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이었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마음이 많이 아팠다. 질문한 지인도 몸이 불편했고,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 여러 아픔을 겪었다. 나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정작 친한 지인의 아픔을 잘 공감하지도 못했고, 간단한 질문에도 참 답하기 난감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몸이 불편하지 않는 사람처럼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질문을 던진 지인도 어려운 현실에 부딪혀 여러가지 타협하게 되었다.


'삶은 왜 불공평할까?'

누군가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누군가는 지독히 가난하고, 누군가는 불행한 가정에서 폭언과 폭행에 시달린다. 왜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렇게 사람마다 짊어지는 짐이 다른 걸까? 이 질문에 단순하게 들었던 생각은 비교였다.


'네가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아프리카나 북한에 태어난 것보다 났지 않아?'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이란 감정도 상당부분 비교에서 나온다. 특히나 상대방과의 경쟁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비교에서 나오는 우월감은 행복의 근원인 경우가 꽤 많다. '적어도 나는 배불리 먹고 30평 아파트에서 사니까', '적어도 나는 좋은 대학교를 나왔으니까' 하는 우월감을 통해 내 불공평한 삶은 어쩌면 나보다 더 불공평한 삶을 사는 사람 덕분에 살 만한 인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는 어떤 면으로나 불행한 누군가는 있을 수 있기에 이런 생각이 적절한 답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 아프리카에 못 사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 삶이 왜 불공평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해야 하는 거지?. 지인에게 이 말은 별 위로도, 하나님의 뜻도 나타내지 못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 왜 굳이 그렇게 만드신 걸까?.


'하나님은 각자의 삶에 합당할 만큼 짐을 주시는 건 아닐까?'

하나님은 애초부터 비교를 원하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삶에 집중하길 원하시고, 각 개인마다 감당할 만한 짐을 주신 것은 아닐까? 우리는 21세기 현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은연중에 건강하고, 대학 간판도 좀 좋고, 반듯한 직장에서 돈도 어느 정도 버는 사람을 가장 완벽한 기준점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점으로 보면 그것도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창조자의 관점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게 보일까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기준점으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삶을 돌보지 못한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흔히 '아름답다'라는 말로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는데, 요즘 시대의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사실 서양인의 미에 가까운 한국인을 찾는 것일 뿐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어원은 '나답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지금은 그 의미와는 정반대로 나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듯하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타인의 삶에 휘둘리지 않은 채 스스로을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태도나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 저마다의 삶이 다르고 개개인에게 합당할 만큼의 삶의 조건을 하나님이 주셨으니 누군가는 장애를 가지고, 누군가는 가난한 이러한 삶이 불공평한 것은 합당한 것일까? 왠지 그럴 듯 하지만, 이 말도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폭력적인 것 같다. 불공평한 삶을 거스를 겨를 도 없이 인정해야 만한다고, 네 인생이니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말이니까.


'너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재능을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상당수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경험적으로 많이 느낀다. 몸이 불편한 내 지인도 사실 어떤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뛰어난 지능과 유머, 글 쓰는 재능도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쩌면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보다는 불완전한 조건을 주어 서로 돕게 살라고 만든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 가지 마음에 걸렸다. 사실 남들보다 특출한 재능이 없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러면 불공평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인가. 이 말도 지인에게 전달할 만한 하나님이 알려주고 싶은 얘기는 아닐 것 같았다.


'죽음 후의 소망을 알려주려고 그러는 것은 아닐까?'

삶이 완벽한 부자는 교회를 따를 이유가 잘 없다.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이유는 인생이 덧 없이 행복하니 신이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 때문에 예전부터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소외받은 계층에게 죽음 이후의 소망을 주고자 하는 구원 때문에 많이들 따라왔던 것 같다. 물론 몇몇 부자는 현생과 죽음 이후에도 편히 지내기 위해 재테크 마냥 교회를 다니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비록 지금의 생애가 힘들어도 죽고 나서는 천국에서 걸을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고 볼 수도 있을 거라고 믿고 많은 사람들은 믿어 왔다. 어쩌면 죽음 이후의 소망을 주고자 누군가의 몸은 불편하게 만드신 걸까? 사실 그럴 것 같진 않다. 하나님이 사이코패스 일리는 없으니까. 물론 나는 내가 가진 결핍이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믿을을 유지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것이 적절한 답인지는 왠지 잘 모르겠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죽음 이후의 삶도 삶이지만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하셨던 것 같다. 교회에서의 죽음 이후의 삶은 사실 성경 자체에는 그렇게 기록이 많지 않은데, 이는 사실 중세시대에 들어와서 단테의 신곡이나 누군가의 환상이 마치 사실인 양 더 많이 묘사되고 적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왜 삶을 불공평하게 만드신 걸까?'

잘 모르겠다. 애초에 똑같은 삶이 있을 수도 없는 것 같고 누군가는 몸이 불편할 수도, 누군가는 좀 지능이 떨어질 수도, 누구는 돈을 좀 못 벌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장수할 수도, 누구 가는 이른 나이에 죽을 수도 있는 걸 보면 나 역시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겠다. 나는 꽤나 숙명론자여서 주어진 삶을 최대한 받아들이려고 한다. 내 앞의 고난과 시련, 주어진 조건에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고 그 결핍이 내 신앙을 더 단단하게 만들며 남들보다 이런 것들을 잘하는 것이 내 장점이니 이것들에 집중하자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다고 내 지인에게 이 말을 전할 생각도, 가르치려 들고 싶지도 않다.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말만 듣고서는 그 고통을 내가 가늠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찮은 나이기에 저마다의 정답을 찾도록 그저 기도하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