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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현석 Jan 24. 2024

동그라미

Love wins all, IU



눈에 띄는 적의와 무관심으로 점점 더 추워지는 잿빛의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무기로 승리를 바라는 것이 가끔은 터무니없는 일로 느껴질 때도 있다.
- Love wins all, IU -


군 시절, 휴가 복귀 차 지하철을 탔을 때의 일이다. 역에서 정차한 차량의 문이 닫히려는 찰나, 중년 남성 한 명이 문틈 새로 몸을 밀어 넣은 채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불편한 눈길을 던졌고, 그건 무거운 군용 가방을 멘 채 서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그와 함께 열차에 올라탄 남자는 걸음을 비틀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던 남자는 한눈에 봐도 장애가 있는 듯했다. 중년 사내는 아들인 듯한 그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날 선 시선을 보내던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역별 정차 시간은 대개 30초 정도이다. 이 30초는 출근 시간이 임박한 직장인에게는 너무나 긴 시간이며, 집에서 늦게 출발한 탓에 이제서야 개찰구를 통과하는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촉박한 시간이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체감되지만, 이는 일시적이기에 대부분은 큰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합의된 이 시간은 승객 모두의 준수를 요구하며, 이는 이용객에 대한 당위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당위성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다가온다.



세상은 여러 선들이 겹겹이 쌓여 수직과 수평을 이룬다. 각진 세상에서 서로 다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합의를 이루고 규칙을 만든다. 물론, 이러한 규칙이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너무나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이기에 다수는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규칙의 당위성이 지니는 힘은 크다. 모두가 어느 정도 양보한 결과물이기에.



그러나, 불편함의 정도가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리는 계단도 산처럼 높고 드세며, 열차 문이 열리고 닫는 시간은 순간처럼 빠르기만 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한편으로는 이해하나, 막상 자기 앞에서 지연되는 시간에 화가 앞선다. 원래 각진 세상이 아니었나. 다치지 않도록 피하는 것도 능력이지 않은가. 보편성은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매김하고, 당위성은 비난과 혐오를 합리화한다. 수직과 수평을 이루는 선들이 그들을 찌른다. 각진 세상, 그들이 숨 쉴 수 있는 원형의 공간은 없다.



인간을 이루는 선은 곡선이다. 각으로 재단할 수 없기에, 동그란 우리의 몸은 모난 세상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웅크리고 펼치며 고통을 피하려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자유조차 상실한 이들은 모서리에 자꾸 살을 베인다. 피가 나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을 향한 시선은 또한 직선이다. 세상만 모난 것이 아니다. 날 선 눈빛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심장을 파고든다. 비명에 무감해진 걸음은 부지런히 갈 곳을 찾는다. 동그란 몸들이 꼿꼿한 수직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노래한다. 사랑은 모두 이길 것이라고. 그러나, 무채색의 하늘과 겹겹이 직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은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이다. 각진 콘크리트 건물 앞, 사랑을 외치는 동그란 몸들은 한없이 작고 약하다. 여전히 계단은 높고 가파르며, 열차는 속절없이 문을 닫고 떠난다.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을 향한다.



그러나,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끝없이 선율이 흐르고, 사랑은 여전히 승리를 외친다. 노래가 민들레 꽃씨처럼 널리 퍼진다. 지하철역 앞 휠체어 위에서 눈물을 쏟던 그녀에게도, 영하의 날씨에 부르튼 입술 사이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던 그에게도. 사랑을 발음할 때 입 모양은 동그랗기에, 모난 세상에 맞서 상처 난 가슴에 볕이 든다. 작은 희망의 싹이 트고, 하늘은 어느덧 푸른색이 덧입혀진다.



여전히 세상은 울퉁불퉁하다. 그러나, 밤을 건너 아침이 오듯 겨울의 끝에 봄이 찾아든다. 노래는 영원하며, 곳곳에서 동그란 입술이 벙긋한다. 우리의 몸은 원래 동그랗기에, 사랑을 닮은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기에. 서로의 눈에 맺힌 물방울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우리는 동그란 눈동자에 담긴 희망의 증거를 발견한다.



도망치고 부서지고 저물어가면서도 사랑은 지독히 함께다.
사랑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 Love wins all, IU -


Love wins all, IU (출처 : EDAM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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