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수업을 준비하다 보면, 교과서 내 학습 질문에서 유난히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묻는 문구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이러한 질문은 아이들에게 다소 어렵게 다가온다. 정답이 있는 질문은 찾아서 적으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느낌을 묻는 질문은 머릿속으로 내면을 한 번 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답들을 적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답변의 형태가 몇 가지로 고착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가령, 글을 읽고 느낀 점을 묻는 질문에는 ‘좋았다.’, ‘재미있었다.’, 조금 더 숙고한 답으로는 ‘다음에도 또 읽고 싶다.’ 정도가 있겠다. 40분 수업에서 모든 아이들의 글을 피드백하기에는 다소 벅차지만, 개중 양식적인 답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고 다르게 표현하도록 주문하곤 한다. ‘어떻게 좋았는데?’, ‘어느 부분이 재미있었고, 왜 재미있게 느꼈어?’ 그럼 아이들은 머리를 감싸 쥐면서도 잠시 펜을 놓고 가만히 생각 안으로 침잠한다. 표현이 멈추고 시선이 내면으로 향하는 순간의 고요. 이 순간을 진득하게 기다리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물론, 가끔은 진도 탓에 이런 틈을 제공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다소 씁쓸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양식화된 표현은, 그러나 비단 아이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당장 나도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특정 표현이 자주 출몰하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글을 다 쓴 후, 퇴고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표현을 다른 어휘로 바꾸어내는 작업을 한다.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들을 사전으로 찾아보기도 하고, 묘사하고자 하는 장면을 여러 각도로 그려보기도 하면서 사고의 흐름을 감싸는 표현법의 테두리를 넓히려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글과 언어 사용 습관을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 특정 표현을 반복하다 보면, 점차 그 어휘에 익숙해져 버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샌가 사용하는 어휘에 사고의 폭이 한정되곤 한다. 내면적 사고의 발현 수단이던 언어가 되려 사고의 폭을 제한하며 영향을 미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2024)는 이러한 언어와 사고의 역학관계를 잘 드러낸다. 프랑스에서 온 여자(이자벨 위페르)는 한국어를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여행자다.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불어를 가르치는데, 그녀의 교수법은 언어의 정통 체계를 따르지 않는다. 그녀는 언어가 표현해 내고자 하는 감정 자체에 보다 집중한다. 그러나, 그녀 주변의 현지인들은 모국어의 사용에 너무나 익숙하다.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언어를 사용하며 대화를 이어가지만, 정작 그들의 언어는, 같은 한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엇나가거나 미끄러진다. 그들은 당황하여 연거푸 말을 내뱉지만, 고착화된 표현들은 내면의 복잡한 감정적 양상들을 추적해 내지 못한다. 남자는 엄마에게 나이 많은 외국인 여자를 애인으로 둔 이유를 설명해 내지 못하고, 엄마는 아들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지 못해 답답해한다. 어떤 글에서, <여행자의 필요>가 <여행자의 피로>처럼 들린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읽고 보니 정말 그랬다. 내면을 표현해 내지 못해 빙빙 도는 언어의 틈에서 여행자는 피로하다. 그녀는 언어에게서 도피하려 시를 읽고, 막걸리를 마신다.
제한된 언어적 표현만으로는 요동치는 숱한 감정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문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은 그러나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존재하되 알 수 없는 감정의 잔향들. 불안과 답답함, 부조리는 이 지점에서 발원한다. 술자리에서 취기가 오르다 보면 횡설수설하며 말이 많아지는 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취하게 되면 감정이 증폭되고 이성적 사유가 제한된다. 밀려드는 감정적 파동에 반해 떠오르는 어휘의 폭이 제한되기에, 말은 많아지며 표현은 어디선가 자꾸만 미끄러지고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취한 이들은 답답하다. 양껏 토해내고 싶지만, 입 밖으로 더운 숨만 연거푸 내뱉어지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영화 <버닝>(2017)에서 종수(유아인) 역시 이러한 답답함을 겪는다. 희망은 보이지 않고 현실은 답답한 세상에서, 자기 앞에 나타난 해미(전종서)에게 그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인물인 벤(스티븐 연)이 그녀 곁에 머무르고, 그녀는 어느샌가 자취를 감춘다. 해독 불가능한 사라짐과 뜻 모를 불편함. 불안과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종수는 연거푸 헤매고 고뇌하며 자위한다. 영화 말미에, 종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종수는 벤을 칼로 찌른다. 이 결말에 대해 영화 상영 당시 말이 많았다. 과연 종수의 살인은 실재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나는 영화의 결말이 일차적으로 종수의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쓰기를 통해 종수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감각한 것이다. 드러나게 악하지 않은, 그러나 알 수 없는 이 벤이라는 인물에 대해 종수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였다. 그 감정은, 논리적인 이유가 선행하지 않지만, 그러나 실재하는 것이다. 아마도 종수의 소설 속에서 종수는 벤을 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수는 비로소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벤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음을, 또한 그가 해미를 사랑하고 있음을 말이다. 실제로 종수가 살인을 저질렀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종수가 내면을 드디어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건 중요하다.
루스 렌들의 소설 <활자 잔혹극>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유니스 피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어휘의 한계, 또는 부재는 내면의 몰이해를, 나아가 공감의 결여를 낳는다. 가정부였던 피치먼은 어휘의 무지로 인해 고용주 일가를 살해하는 비극을 초래한다. 언어는 내면의 사유를 추적하고 붙잡으려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해되지 않은 내면적 감정은 부조리를 낳기에,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현해 내는 과정은 중요하다. SNS의 발달과 더불어 언어와 활자들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그러나 내면을 명징하게 밝혀내는 깊이와 넓이가 그만큼 확장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당장 <버닝>(2017)이 개봉하고 몇 년 뒤, 전국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테러가 일어났다. 이해되지 못한 감정들이 쌓여 불안과 분노가 싹튼다. 어휘는 갈 곳을 잃는다. 주변이 카프카의 성으로 둘러싸인다.
쉬는 시간이면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 아이들이 몰려오곤 한다. 아이들은 감정 표현에 솔직하다. 지금 마음이 어떻니? 대개 아이들은 막힘없이 대답한다. 기분 나빠요, 짜증 나요, 화나요 등등. 나는 연거푸 질문을 건넨다. 기분이 어떻게 나쁘니? 왜 그런 기분이 들었니? 주절주절 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이 다소 가라앉는다. 언어화된 감정이 이해되어 조금씩 증발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마음 자체를 부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생겨버린 감정은 그 자체로 인정해 준다. 그 대신, 어휘로 판별된 감정을 가지고 탐험하듯 근원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말을 주고받으며 그 시작점에 다다르면, 감정을 해소하는 길의 방향을 탐색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최대한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도록 지도한다. 이해의 폭을 넓혀 조금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도록. 아이의 기분이 풀리고 나면 어느새 쉬는 시간이 끝나 있고, 나는 기진한 채 널브러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문득 이자벨 위페르의 피로를 어렴풋이 공감하게 된다. 그녀 또한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이럴 때 어떻게 했지. 여행자는 막걸리를 마시고 시를 읽었다. 교실에서 막걸리를 마실 수는 없으니, 나는 교탁 옆 책꽂이에 놓인 시집을 집어 든다. 아직 덜 읽은 하수경 시인의 시집이 보인다. 시인은 언어 바깥에 침잠해 있는 마음들을 어떻게 감각했을까. 아이들이 떠난 교실,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시인이 탐사하고자 했던 언어 너머의 내면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