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정한 사랑인가?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3편

by WNM

"영원을 약속하는 대신, 오늘을 남김없이 소진하며 사랑하고 있나요?"


우리는 흔히 사랑에 영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을 꿈꾸는 것은 어쩌면 현재의 뜨거움을 외면하는 기만일지도 모릅니다. WNM(FOCUS)는 <시지프 신화> 세 번째 탐구를 통해 카뮈가 정의한 성숙하고 용기 있는 사랑을 들여다봅니다.


카뮈에게 사랑이란 보상이나 미래를 기대하는 희망이 아니라,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오늘 상대의 곁에 머물기로 결심하는 의지입니다. 어제 사랑했기 때문에 오늘 관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권태라는 부조리 앞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당신을 다시 선택한다"라고 선언하는 매일의 결단입니다. 이별의 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현재의 감정을 남김없이 연소시키는 것, 고통과 권태마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밀도 높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반항적 사랑의 모습입니다.


당신에게 가장 정직한 사랑의 형태는 어떤 모습인가요?




Q. 카뮈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카뮈는 "사랑한다는 것은 희망 없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보상이나 영원함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상대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명확히 인지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상대의 곁에 머물기로 선택하는 의지야말로 카뮈가 말하는 성숙하고 용기 있는 사랑의 모습이다.


Q.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전통적 가치가 강조하는 영원성이나 일편단심은 유한한 인간의 조건을 부정하는 추상적 기만일 수 있다. 카뮈는 미래를 약속하는 대신, 현재 마주한 상대와의 감정을 남김없이 소진할 것을 권한다. 영원을 갈구하며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있음을 알기에 지금의 뜨거움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부조리한 인간의 진실된 사랑이다.


Q. 그럼 불타오르는 사랑을 위해 여러명을 만나라는 의미인가?

카뮈가 질(Quality)보다 양(Quantity)를 강조한 것은 바람둥이처럼 다수의 연인을 탐닉하라는 세속적 의미가 아니다. 핵심은 얼마나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사랑했는가에 있다. 관계의 횟수가 아니라 현존의 밀도가 중심이다. 가벼운 관계의 반복은 새로움과 쾌락을 줄지는 모르나, 실존의 밀도를 높여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한 사람을 오래 만나더라도 매 순간 관계의 유한함을 인식하며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의식의 총량 측면에서 훨씬 거대할 수 있다.

이별의 가능성(부조리)을 인지하면서도 매일 새롭게 상대를 선택하는 의지가 진정한 '반항적 사랑'이다. 어제 했기 때문에 오늘 관성적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매일매일 다시 선택하는 책임이 쌓여가는 과정, 그것이 부조리한 인간의 사랑이다.


Q. 사랑의 고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카뮈는 절대적 자유를 중시했지만, 사랑과 연대는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책임과 구속을 동반한다. 이것이 자유를 제한하는 감옥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카뮈에게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반항의 한 형태다.

사랑의 고통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밀도 높은 감각이다. 우리가 책임을 지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법칙이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실존적 진실을 부정하지 않기 위한 저항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좋아질 거야"라는 희망으로 눈감지 않으면서도, 현재의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가장 정직한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Q. 사랑의 권태는 삶의 권태와 같은 선상인가?

삶의 권태가 "왜 살아야 하지?"라는 물음과 함께 일상의 기계적 반복이 부조리로 다가오는 순간이라면, 사랑의 권태는 "왜 이 사람 곁에 있어야 하지?"라는 질문과 함께 관계의 반복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다.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이 권태라는 부조리와의 대면이 일어났을 때, 그 긴장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도피하느냐 하는 태도에 있다.


Q. 사랑의 권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사랑은 단순히 강렬한 순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얽히며 빚어내는 하나의 서사(Narrative)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권태가 찾아왔을 때 관계를 폐기하는 것은, 그 터널을 통과한 뒤에만 도달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의 역사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매 순간의 자극만을 좇으며 관계를 파편화하면, 인간의 자아 역시 축적된 서사 없이 흩어진 파편들의 집합체로 남게 될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비합리적이기에 권태를 견딘다고 해서 성숙한 사랑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성숙해질 테니 지금의 불행은 참자"는 식의 보상 심리는 미래라는 우상에 현재의 실존을 바치는 카뮈적 정신적 자살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견디는가이다. "10년을 만났으니 당연히 사랑해야 해"라는 과거의 관성이나, "참으면 행복이 올 거야"라는 미래의 희망에 기대는 것은 실존으로부터의 회피다. 진정한 반항적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 이 사람을 다시 선택한다"는 매일의 결단 속에 있다.

니체는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매 순간의 선택에 영원한 책임이 따르기에 고통과 후회까지 반복되는 저주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고통까지 포함해 삶을 그대로 다시 살 의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진정한 실존적 용기는 권태와 익숙함마저 삶의 필연적인 재료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렇게 쌓인 서사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치열한 반항의 결과물로서 긍정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시지프 신화> 시리즈는 총 4편에 걸쳐 매주 목요일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바로 확인하려면 : https://wnm.kr/wnmfocus-life


︎▷1편: 어차피 죽는 삶, 무슨 의미인가?

▷2편: 의미 없는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편: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가?

▷4편: 진정한 사랑과 반항의 실천, 그것은 선택인가 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