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부다페스트 하늘에 핑크 와인을 부은 걸까?
여행 넷째 날
언젠간 꼭 한번 더 보고픈 곳, 부다페스트.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니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하며 내심 여행의 끝을 실감해가고 있었다. 숙소를 한 곳 한 곳 체크아웃할 때마다 동생과 아쉽다는 소리를 연신 내뱉었다. 매일 아침마다 몸집만 한 캐리어를 끌고 호텔을 나서는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떠나는 길은 아쉽지만, 새로운 곳을 가게 될 기대감에 힘입어 동생과 버스에 앉아 오늘도 예쁜 것들을 모조리 눈에 담아오자고 다짐했다. 여느 날과 같이 버스는 힘차게 출발했다.
창 밖의 스치는 풍경들을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그러다 스르륵 잠이 들기도 한지 4시간 남짓 지나던 때 수군대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잠시 멍해졌다. 버스는 아름다운 부다페스트 깊숙이 우리를 데려가고 있었다.
"헐, 예린아 저기 봐봐 진짜 예뻐."
프라하 까를교 다리 위를 건널 때와는 또 다른 풍경에 두 자매의 기분이 잔뜩 상기되었다. 부랴부랴 카메라와 짐을 챙겨 들었다. 부다페스트는 프라하와는 어떤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을지 한껏 기대를 안고 활짝 웃는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어부의 요새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중, 어디선가 귀를 간지럽히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뚠뚠뚠 공기를 타고 흐르는 연주 소리가 마치 여행 프로그램에서 근사하고 멋진 여행지를 소개할 때 깔리는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뭐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 감미로운 환영음악은?' 음악소리에 이끌려 올라가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따라 천천히 한 계단씩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계단 위를 오르자 이윽고 나는 온몸을 휘감는 활기에 입은 벌어지고 두 눈이 커졌다.
"우와~!"
동생과 나는 계단 위를 오르자마자 육성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래에서 올라올 때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큰 광장이 눈앞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위를 거니는 수많은 관광객들. 연인과 손을 잡고 기웃거리며 구경을 하고, 서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처럼 내 눈으로 담겼다. 살짝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웅장한 기품을 자랑하는 마차시 성당이 보였다. 왜 어부의 요새를 지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지키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웅장한 자태에 압도되어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30분 정도 짧게 주어진 자유시간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동영상으로 좀 더 많이 남겨둘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높은 지붕 위로 한 결의 햇빛까지 곁들이니 더욱 멋있었다. 프라하에서도 느꼈지만 섬세하게 조각나 있는 문양들이 너무 신기했다. 작은 문양들과 뾰족한 지붕은 완벽한 '성'의 느낌을 주었다. 동양은 섬세한 멋이라면, 서양은 화려한 멋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가볍게 어부의 요새의 인기 사진스팟에서 사진을 찍고 부다왕궁을 지나 겔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구경을 하느라 바빴지만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적당한 백색소음까지,부다페스트를 즐기기엔 완벽했던 날씨였다.
겔레르트 언덕 위에 다다르니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다뉴브 강과 부다페스트의 모습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언덕 위 살살 불어오는 초여름 바람이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을 스치며 반갑다고 인사하듯 휘감았다. 탁 트이는 전망을 느끼고 있자니 두 눈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다리를 사이에 두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많은 차들이 북적이는, 조금은 소란스러운 서울 한강의 풍경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그 순간 이곳이 주는 고유의 따뜻한 느낌을 한껏 즐겼다.
겔레르트 언덕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겔레르트는 헝가리 초대 왕 이슈트반 1세에게 초청되어 이탈리아에서 온 전도사라고 한다. 헝가리인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하다 이교도들에 의해 통 속에 갇힌 채 언덕에서 떨어져 순교하였고, 그런 그를 기린 곳이 바로 겔레르트 언덕이었다. 역사를 모른 채 단순히 예쁘다며 구경만 다녔다면 단순하고 비싼 감상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르나, 여행 내내 역사와 더불어 관광을 하다 보니, 이렇게 예쁜 풍경을 편하게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여행 내내 감사하며 관광했던 것 같다.
핑크빛 노을빛이 흩뿌려놓은 부다페스트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우리 이따 저녁에 거기 갈까, 말까?"
오전 관광을 마치고 잠시 숙소로 돌아와 쉬던 우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하고 있었다. 그 논의의 주제는 바로 '저녁에 어부의 요새를 또 보러 다녀올 것인가'였다. 일정을 마친 뒤, 우리에게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숙소에서 쉴 사람들은 편하게 쉬고, 저녁에 관광을 다녀오고 싶은 사람은 다녀와도 좋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우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첫 번째, 한 번도 해외여행을 자유로 다녀온 적이 없었던 우리는 선뜻 저녁에 밖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두 번째, 영어도 잘 못하는지라 길을 잃으면 방법이 없었다. 참고로 오전 일정에서도 자유시간에 돌아다니다 길을 잃어 버스를 놓칠뻔했었는데 이걸 생각하니 더 무서웠다. 세 번째, 다소 치안에 대한 두려움이 있던 우리는 혹시나 어두운 저녁에 나갔다가 봉변을 당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심각하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도전해보기 전의 두려움은 그 도전의 숙제가 어떤 것이든 무서운 건 매한가지인 듯하다. 우리가 결정을 못 내리고 방황하는 사이, 숙소 유리창 밖의 풍경은 마치 우리 보고 콧바람 쐬러 나오라고 재촉하듯 평화로웠다.
"그래도 살면서 한 번 올까 말까 한 곳인데 일단 한번 나가볼까...?"
확신에 차진 않은 결정이었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동생에게 물었다.
"음... 그래 뭐 우버 타고 관광지 바로 앞에서 내리는 건데 길 잃기야 하겠어?"
"그래 맞아 뭐 길 잃기야 하겠냐? 우리는 길치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가자!"
애써 불안한 우리를 스스로 다독이며 서둘러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 로비로 나섰다. 로비에는 마침 패키지 일행분들이 계셨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그분들도 저녁의 부다페스트 풍경을 보러 다녀올 참이라는 운 좋은 소리를 들었다. 이때다 싶어 나는 함께 우버를 타고 동행하자고 제안했고, 흔쾌히 수락한 일행분들과 함께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우버를 타고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버스가 아닌 우버를 타고 헝가리의 거리를 누비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해외에서 택시도 타보다니, 진짜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음에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두 분은 어디에서 오신 거예요?"
함께 탄 언니 한 분이 우리에게 질문을 건네 왔다.
"아, 저희는 평택에서 왔어요!"
"어머, 진짜요? 제가 일하는 곳도 평택이에요!"
아니, 이런 우연이...? 그 말을 들은 순간 우버 안은 서로 '헐' , '대박', '신기하다'만 연발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심지어 평택의 수많은 동네 중에서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더 소름 돋았던 순간이었다. 하필 그날, 그 패키지에,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10시간을 함께 날아온 사람이 많은 지역 중에 우리 동네에 계신다니. 이런 게 바로 여행을 하며 느낄 수 있는 반가운 요소 중에 하나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정신없는 수다를 나누던 사이 우버는 어부의 요새 앞에 도착했다.
"저희 그럼, 두 시간 정도 서로 자유롭게 구경하다가 여기서 다시 만나서 갈까요?"
"네, 좋아요! 좋은 여행 되세요!"
기분 좋은 대답과 함께 동생과 함께 다시 오전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어부의 요새 위로 올랐다. 계단을 올라가던 중 잠시 뒤를 돌아봤다. 해가 쨍쨍하던 낮과는 달리 저물어가는 하늘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졌다. 살면서 다시 한번 동유럽에 갈 일이 생긴다면 나는 결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 한번 마주하러 오리라고 다짐했다. 어부의 요새 위로 오른 우리는 발길이 이끌리는 대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동네는 진짜 왜 이렇게 짜증 나도록 예쁜 거야...?'
낮과는 다른 또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는 하늘로 날아가듯 흩어졌다. 선율이 흩어지는 하늘은 누군가의 바이올린 소리에 곁들이듯 옅은 핑크 와인색 그라데이션을 띄고 있었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가 연상되는 꿈의 나라 같은 하늘이었다. 강가를 따라 불이 켜진 건물은 그런 하늘을 더 밝게 비추듯 주황빛을 띄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웠던 풍경에 넋이 나가서, 눈에 담고 사진에 담느라 짧고 급하게 찍힌 동영상을 볼 때마다 그때의 나에게 꿀밤이라도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다. 그때의 공기가 그리운 지금에서야 꺼내보니 턱없이 짧게 담겨있어 여행에 대한 갈증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사진을 찍으며 한 눈 판 사이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옅은 불빛을 내던 국회의사당 불빛은 어둑해지는 하늘을 따라 더욱 밝게 빛을 냈다. 무섭다고 안 왔다면 지금쯤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을지 생각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여행을 다니다가 가끔 광활한 풍경을 마주할 때면 나는 항상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나의 고민거리들을 되감곤했다. 때로는 그 생각이 정리될 때도 있었고, 시원하게 날려버릴 때도 있었다. 주로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보며 그런 생각들을 하곤 했는데, 부다페스트의 풍경은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곳이지만 나를 멍하니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 곳이다. 온 감각들이 호강을 하던 순간이어서 그런지, 그날은 유독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 되지도 않던 재산의 반을 털어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한 스스로를 칭찬했고, 언젠간 이곳에 더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찾게 될 나를 그리며 앞 날을 다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헝가리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동생과 다리 밑 산책길로 내려갔다. 이야기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서 아득히 보이던 국회의사당의 불빛이 가까워져 있었다. 가까이서보니 더 웅장하고 멋있어 보였다. 삼각대로 사진을 찍는 사람과 보드를 타고 선선한 바람을 느끼는 사람들, 길가를 은은히 밝히는 가로등까지 그 어느 하나 여유롭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기억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삼각대도 없이 정신없이 서로의 사진만 찍어대던 우리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Hey! Can i take a picture?"
뒤를 돌아보니 외국인 두 명이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대답했다.
"Sure!"
사진을 찍어준 뒤 돌려주자, 우리에게도 사진을 찍어준다는 말을 건네 왔다. 서로 우물쭈물 대면서 쭈뼜거리자 외국인 관광객은 이렇게 소리쳤다.
"Hug!!"
'뭐시라? 안으라고?'
잠시 서로를 어색하게 쳐다본 뒤, 살포시 서로를 껴안았다. 동생이랑 어렸을 때 이후 껴안아본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서 어색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킥킥거리면서 웃고 있던 찰나 찰칵! 소리와 함께 우리의 순간은 사진에 담겼다.
내가 배운 여행의 의미
함께 나눈 '감정'과 '기억'이 나를 살게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매번 나의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 했었다. 그 동행의 대상은 주로 가족, 친구, 남자 친구 등 소중한 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예쁘고 멋있는 것들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그 순간에 나눈 '감정'들은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그날들을 끄집어내곤 한다. 혼자였다면 외로울 수도 있었겠지만 내 옆을 든든히 지켜준 그들의 온기가 있었기에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할 수 있었다.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끄집어내며 실실 대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날의 순간과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유럽 여행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지금과 같이 소중한 사람들과 순간을 함께 할 수 있길 기도하며.
[너에게]
달빛의 은은함을 한껏 머금어
밝게 비추는 프라하 성 아래의 우리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않고
너와 나와의 시간과 느낌을 공유할 거야
매일 저 지구 건너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이불 속에서 기대하고 그려보던 장면이
드디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세상 속에서
여유롭게 거리를 누비며
우리가 있던 세상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자유를 느껴볼 거야
그 누구보다 든든한 너와 함께라
더 찬란한 우리의 한 때는
먼 훗날 커다란 추억이 되어
눈을 감을 때까지 남아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