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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Mar 10. 2022

"아빤 너랑 술 한잔이 너무 좋아."

아빠의 그 작은 행복, 언제든 지켜줄게.



아빠에게 건네는 딸의 짓궂은 농담

내가 아장아장거릴 때가 좋아, 나랑 술 마시는 게 좋아?


어느새부턴가 우리 집 식탁에는 종종 소주와 맛있는 안주가 등장할 때가 많아졌다. 코로나로 인해 밖에 잘 나가질 못하다 보니 오히려 가족들과의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평소 친구들과 분위기 있고 음악이 흐르는 술집에서 술 한잔 기울이며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것을 좋아했다. 그에 비해 다소 조용하고, 굳이 시끄럽다면 거실에 틀어져있는 TV 소리가 다인 우리 집은 내가 좋아하던 술집 분위기와는 매우 달랐다. 처음에는 아빠와 술잔을 기울이는 게 조금은 어색했다. 너무 조용하다 보니 오히려 더 빨리 취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몇 달이 흐른 지금, 나의 또 다른 술 메이트는 우리 아빠와 할머니가 되었다.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어색했던 우리 집은 '아빠, 오늘 딸내미랑 소주 한잔?'하고 꼬실 수 있는 둘도 없는 낭만 술집이 되었다.


아빠랑 할머니와 함께 간단히 술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는 가득 채워져 있던 잔을 비우며 대뜸 나를 쳐다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는 딸이랑 이렇게 술 한잔 먹을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오~ 진짜?"

내가 되묻자 할머니는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러게, 우리 예령이랑 이렇게 한 잔 먹으니까 술맛이 사네."

오홍홍홍, 하며 웃으시는 할머니 특유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럼, 아장아장 걷던 때가 엊그젠데, 언제 이렇게 커서 아빠랑 술을 다 먹냐."


아빠는 종종 어느덧 훌쩍 큰 딸을 보며 세월을 실감하기도, 지금의 딸과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에 즐거워하시기도 했다. 술잔을 가득 채우며 못 다했던 가족들과의 대화가 채워졌고, 아빠의 속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 생겨났다.


"오우, 요놈 봐라? 누구 닮아서 술 마셔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냐?"

가끔은, 아빠의 젊을 적 시절을 빼닮은 큰 딸의 숨겨뒀던 주량을 보며 섬뜻 놀라기도 하셨다. 그동안 친구들과, 남자 친구와 밖에서만 노느라 미처 못 보여드렸던 나의 숨겨둔 소소한 면들에 놀라며 호탕하게 웃는 아빠를 보며 '내가 정말 아빠와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아빠와 추억을 안주삼아 곱씹다 어릴 적 앨범을 꺼내 들었다. 사진을 보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술잔은 채워졌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오로지 아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나와 동생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에휴, 니들 이렇게 쪼그만 할 때로 돌아가고 싶다."


아빠의 검지손가락을 꼭 잡고 아장아장 걷던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어릴적 동생과 나의 사진이다.
어릴적 나는 종종 아빠 배에 찰싹 붙어 꿀잠을 잤다고 한다 :-)


그런 아빠를 보며 나는 이렇게 짓궂게 묻곤 했다.

"아빠, 그럼 이때랑 지금 나랑 이렇게 술 먹을 때랑 딱 하나만 고르면 언제가 좋은 것 같아?"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질문에 아빠는 '요 녀석 봐라'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시더니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셨다.

"지금 딸이랑 이렇게 술 먹는 게 더 좋지. 아빠는 이게 너-무 좋다."


진작에 아빠랑 종종 술잔을 기울일걸, 그게 뭐 어렵다고. 단 한치의 망설임이 없이 대답하는 아빠를 보는 순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아빤 소중한 딸과의 시간을 오래전부터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와의 시간이 조금은 어색하다고, 집에서 먹는 술은 맛이 없다고 밖에만 열심히 싸돌아다녔던 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살짝은 애틋하기도 했던 아빠의 대답이었다.






"너네랑 먹으니까 술이 달다."

딸과도 같은 너희와 먹는 이 순간이 달다.


몇 주전, 아빠의 오래된 친구들이 우리 집을 찾아오셨었다. 중학교 시절에 만나 나이 50을 넘긴 지금까지 연락 한번 끊기지 않고 이어왔던 아빠의 오래된 벗이었다. 나와 동갑인 삼촌의 딸과도 동생과 함께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오며 지냈던 만큼, 나에겐 삼촌이나 다름없는 분들이자 우리 가족과 허물없는 사이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나는 오랜만에 뵙는 삼촌들을 반기며 인사를 건넸다.


"오! 집에 있었네? 오늘 삼촌들이랑 놀아주는 거야?"

매주 주말마다 데이트를 나가느라 집에 없었던 내가 웬일로 집에 있으니 삼촌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나에게 물으셨다.

"아유 그럼요, 오늘은 특별히 삼촌들이랑 놀려고 데이트도 미뤘죠."

"오호! 그래, 오늘 오랜만에 삼촌들이랑 놀자."


약 1년 만에 다시 뵙게 된 삼촌들과 둘러앉아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삼촌 한 잔, 아빠 한 잔, 동생 한 잔, 나 한 잔. 채우고 비워가는 술잔들과 함께 웃음소리는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응애응애 하던 애들이 언제 이렇게 커서 삼촌들이랑 술을 다 먹냐며, 삼촌들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좋아하셨다.


"크-으, 오늘 딸들이랑 마시니까 술이 너무 달다, 달아."

술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며 삼촌이 말씀하셨다.

"야, 애들아 오늘 삼촌들이 너네랑 술 한잔 마신다고 엄청 기분이 좋은가보다. 평소보다 되게 기분 좋아 보이는데?"

아빠 역시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네도 다음에 올 때 애들 한번 데려와, 다 같이 마시면 진짜 너무 좋겠다."

"그래, 그래야지. 담에 코로나 나아지면 아들내미 딸내미들이랑 다 같이 한 잔 하자."

그날따라 왠지 아빠의 어깨가 높아 보였다. 삼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다시 한번 느꼈다. 이렇게 작고 소소한 순간들이 아빠들의 행복이었구나.


"예령아, 오늘 삼촌이 갑자기 전화 와서 뭐라는지 아냐?"

다음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자마자 아빠는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셨는데?"

"아니 우리끼리 오글거리는 말 일채 안 하는데 아까 대뜸 전화와서는 어제 너무 재미있었다면서 말하더라?"

아빠도 다시 한번 생각하니 삼촌의 한마디가 웃기면서도 좋았는지 얼굴에 얕은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진짜? 삼촌이 진짜 좋으셨었나 보네."

아빠를 따라 나도 실실 웃었다. 가족끼리조차 점점 더 얼굴을 보기 힘들어지는 요즘, 가끔씩 찾아오는 이런 소중한 시간과 웃음들을 더 많이, 자주 지켜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에게 하는 약속

언제든, 아빠의 그 작은 행복을 지켜줄게


요즘도 가끔 주말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맛있는 음식이 식탁에 오르면, 엄마 몰래 아빠와 둘이 '소주 한잔?' 텔레파시를 주고받곤 한다. 퇴근 후, 함께 술을 먹자며 아빠를 꼬시는 동료들의 성화에 '나 오늘 못가, 딸이랑 술 한잔 하고 있어.' 라며 당당하게 거절하시는 아빠의 표정에는 '나 부럽지?'라고 말하듯 쓰여있곤 한다. 아빠는 그럴 때마다 동료들이 딸과 오붓하게 술을 마시는 걸 너무 부러워한다고 뿌듯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런 아빠의 얼굴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한다. 기분이 좋기도, 애틋하기도, 뿌듯하기도 한 미묘한 감정들이 잠시 머물렀다 스쳐간다.


작년 여름, 퇴사를 한 뒤 다음을 준비하며 아빠와 저녁 산책을 자주 나가곤 했다.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던 아빠와 선선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길을 걸었다. 그동안 아빠에겐 전하지 못했던 나의 고민들, 진로 이야기, 남자 친구와의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들.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며 나는 그동안 몰랐던 아빠에 대해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아빠가 얼마나 평소에 나를 많이 걱정하고 생각했는지. 딸과의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얼마나 원했는지. 평소 감정표현이 어색하신 아빠의 입에서 '딸이랑 이렇게 걸으니까 좋네.'라는 말이 나오면 낯부끄러우면서도 그 한마디가 얼마나 뿌듯함을 안겨주는지 모른다.


딸과 기울이는 술잔, 그 한 잔마다 풀어내는 이야기. 한 잔씩 부딪히며 어느새 붉어진 아빠의 얼굴에는 하루의 고단함을 잠재우는 의미가 아닌, 딸과의 두런두런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렇게 작고 소소한 게 우리 아빠의 행복이었구나. 너무 적게도, 또 너무 많게도 아닌 딱 적당한 기분 좋음. 그 기분 좋은 적당한 취기를 나는 오래도록 아빠와 함께할 것이다. 아빠의 작은 행복, 언제든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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