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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Jun 13. 2022

우리 산책하러 나갈래?

선선한 바람 부는 저녁, 지금이 딱인데!



따로, 또 함께 걷는 하루들

내가 걷는걸 이토록 사랑하게 된 이유


드디어,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봄과 여름의 사이, 따스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공존하는 계절. '걸을 수 있는 계절' 말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도, 뜨겁도록 내리쬐는 날에도 날씨는 옵션에 불과하다. 길을 지나다니는 차들과 사람들을 보며 그저 유유히 걷는다. 생각이 많아져 걷는 걸음도,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걸음도 상관없다. '걷기'가 주는 기쁨은 종류에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도 좋으니 말이다. 두 다리만 있다면 언제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게 걷기의 가장 큰 묘미가 아닐까?


내가 그토록 걷기를 좋아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걷는다는 것에 있다. 혼자 음악을 들으며 걷는 날도 좋지만 가족, 친구들과 함께 발걸음을 맞춰 걷는 시간은 유독 더 귀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게 좋아진 이유는 나의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중고 시절, 나의 등하굣길은 항상 친구와 함께였다. 집 방향이 같은 친구들을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하루하루를 같이 걷다 보면 자연스레 사계절을 함께 맞이하곤 했다. 봄에는 벚꽃을 함께 보며 "아니, 내가 왜 너랑 첫 벚꽃을 봐야 되는 거냐?"라고, 겨울에 첫눈이 오는 날이면 "내가 너랑 첫눈을 보게 되다니..."라고 퉁명스러운 장난을 건네며 걸었던 귀여운 추억들이 떠오른다. 푹푹 찌듯이 더운 날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간식거리를 사 먹고, 가끔 학교 앞 정문에 있는 떡볶이 집에도 가며 더 가까워지기도, 숨겨왔던 마음들을 알게 되기도 했다. 걸어서 30분이 걸리는 거리지만 함께하면 어찌나 그렇게 시간이 빨리 흐르는지, 버스를 타고 15분 만에 올 수도 있던 거리였지만 15분을 더 내어 함께 걸으며 나눈 시간은 소중한 추억이 되어 겹겹이 쌓였다.


걷다가 마주한 재미있는 우연도 한몫한다. 요즘같이 좋은 날에는, 엄마와 조금 더 오래 걷곤 한다. 짧게는 한 시간 반부터 길게는 세 시간까지. 여느 날과 똑같이 엄마와 산책을 하던 날, 길을 걷다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봐도 친구 같다는 생각에, 냅다 큰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외쳤다. 흠칫 놀라며 쳐다보다 이내 반가워하는 친구를 보니 더욱 우연한 만남이 신기했다. 친구도 엄마와 함께 강아지 산책 겸 걷고 있던 찰나여서 가벼운 인사와 함께 기분 좋게 헤어졌다. 그런데 이 평범한 에피소드가 재미있는 썰이 되어버린 데에는 이게 한 번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코로나 검사를 받으러 가던 날에도, 등산을 하던 날에도,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귀신같이 마주치곤 했다.


엄마와 동네 한 바퀴를 걷다 배가 허기져 들어간 김밥집에서 창밖을 보며 여유롭게 식사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밥을 먹다 말고 엄마는 대뜸 나에게 창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

"예령아, 누가 자꾸 쳐다보는데?"

"누가?"

엄마의 말을 따라 힐끗 창문을 쳐다봤다. 이내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가 내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려 뚫어져라 쳐다보며 몇 초의 시간이 흐르던 찰나, 나는 "뭐야!" 소리치며 튀어나가듯 김밥집 문을 열어젖혔다. 반갑다고 달려오는 친구네 강아지를 안으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몇 번씩이나 만나는지, 엄마와 함께 강아지 산책길을 오른 친구를 보며 한참 동안 신기하다며 웃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뒤, 이내 띵동!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야, 이 정도면 우리 운명 아니냐?"


그러게, 이건 분명 운명이야!






걸으며 알게 된 소중한 마음들

내딛는 걸음과 함께 나눈 마음


작년 여름, 아빠와 걸으며 그동안 몰랐던 아빠의 속마음을 참 많이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아빠와의 시간은 많이 보낸 적이 없었던 터라 아빠와 단 둘이 걷는 게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어색했던 공기는 나와 아빠의 이야기들을 통해 몽글한 바깥공기와 함께 사라졌다. 엄마에게는 들을 수 없었던 현실적이고 따끔한 조언을 해주기도, 잘하고 있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진 고민의 무게를 잘 이해해주고 응원해주는 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던 소중한 걸음이었다. 아빠는 가끔 몽글한 공기의 마법을 빌려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도 슬쩍 건네곤 하셨다.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거나 술을 드신 뒤 천천히 집으로 걸어오는 아빠를 마중 나갈 때, 아빠는 수줍으면서도 다정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딸이랑 이렇게 걸으니까 좋네!"

아빤 딸과의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얼마나 원하고 계셨을까. 그런 아빠의 작은 용기에 화답하듯 서로의 소소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요즘도 열심히 거리를 나선다.  


추운 날들이 지나가고 서서히 따스한 공기가 맴돌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가끔 남자 친구와 산책을 나가곤 했다. 말없이 그저 손을 잡고 거리를 누비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함께 구경했다. 길을 걷다 버스킹 소리가 들려오면 길가에 툭 걸쳐 앉아 함께 흥얼거리기도 하며 소소한 추억들을 쌓았다. 거리를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하늘에 떠있는 달이 예쁘다, 오늘은 바람도 안 불고 날씨가 너무 좋다, 저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서 저리 즐거워 보이는 걸까?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걷다 보면  문득, 몸에 닿도록 느껴지는 변화를 발견한다.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편한 사이가 되었다는 것.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평소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았던 남자 친구는 어느 새부터 자신의 고민과 생각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는 스트레스받는 일들,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본인만의 고민들 등등. 스스로 고민을 해결하고 상황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았던 사람인지라 더욱 그 감사함과 감동이 크게 다가왔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부터 나만 알고 싶었던 숨겨둔 비밀 이야기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햇살이 되어줄 수 있음이 얼마나 큰 믿음을 기반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와 걷는 시간들은 항상 소중하고 행복하다.   






나만의 힐링 챙기기

음악+걷기=이게 바로 천국


요즘같이 날이 좋을 때엔 약속이 있을 때에도 일부러 걸어가기도 하고, 그냥 바깥바람이 쐬고 싶어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걷는 시간에 유일하게 주어지는 여유를 누리기 위해 음악과 함께 길을 걷는다.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복잡했던 생각들이 차분히 정리되는 신기한 힘을 경험하곤 한다.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며 가장 인상 깊게 다가왔던 대사가 있었다.

"이래서 내가 음악을 좋아해. 가장 따분한 순간까지도 갑자기 의미를 갖게 되고, 평범하게 음악을 듣는 순간까지도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변하지."

 

영화 속 장면처럼 그저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걸었을 뿐인데, 주변의 평범한 것들은 다채로운 색을 입는다. 바닥으로 향해있던 눈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음악을 입어 따뜻해진 세상이 나를 맞이한다. 흘러나오는 가사 하나하나, 음정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천천히 걷는다. 뉘엿뉘엿 저무는 해가 예뻐 보이고, 하늘에 떠있는 평범한 구름이 예뻐 보이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든다. 사소한 것들이 예뻐 보이는 그 순간, 나의 힐링은 시작된다.







바쁘기만 한 삶에 지쳐 여유가 필요한 때가 왔다면, 거리를 걸어보자. 혼자도 좋고, 함께라도 좋으니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에 푸릇한 풀들도 보고 청량한 하늘도 보며, 많은 이들의 일상에 작은 행복들이 깃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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