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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Jun 30. 2022

붕붕이 목욕하기 대소동

때 빼고 광내며 느낀 소소한 감정들



둘만의 새로운 데이트 코스

"오늘 우리 세차하러 갈래?"


"령아, 세차하러 같이 갈 거야?"

"그래! 이따가 열 시쯤에 집 근처에 있는 세차장으로 차 끌고 와!"


2주 전,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조금씩 식어가던 저녁 여덟 시 반 무렵이었다. 잠깐 친구들과 동네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찰나, 띠링! 하고 카톡 알람음이 울렸다. 남자 친구에게 온 연락이었다. 요즘 나와 남자 친구는 이전에는 해보지 않았던 특별한 데이트를 하고 있다. 이름하야 '세차 데이트'. 해가 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쯤, 우리는 저녁 데이트로 세차를 가곤 한다. 세차 데이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남자 친구가 최근에 새로 차를 장만하면서부터였다. 십여 년 만에 마련한 차라 그런지 차를 어루만지는 두 눈에서는 양손으로 받아도 흘러 넘칠만큼 꿀이 뚝뚝 떨어졌다.


"오빠 차는 애칭 안 지어줘? 내 차는 붕붕인데."

"흠~그럼 나는 드롱이로 할까?"

"오- 드롱이라... 드롱드롱... 드롱이 귀여운데?"

즉석에서 지어낸 이름치고 너무 귀여운 이름에 우리는 서로 킥킥거리며 번쩍번쩍 빛나는 드롱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예쁜 드롱이도 날씨는 못 이기는 법! 본격적인 장마철이 시작되는 지금, 하늘에서 야속하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지나가며 남자 친구는 한탄을 늘어놓았다. '왜 꼭 세차를 하고 나면 비가 오는 거냐, 차도 커서 힘들어 죽겠는데 언제 또 세차를 하고 있냐' 등등. 조수석에 앉아 나라 잃은 듯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고 있는 남자 친구를 보자면 안쓰럽기도 한데 오빠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웃기기도 했다.


"령아, 오빠 요번에 이거 샀다?"

"뭐야, 세차용품 또 샀어? 이러다 가게 차려도 되겠다!"

"아냐 이거 기스같은거 지우는 거라 진짜 꼭 필요해!"

그날은 처음으로 오빠를 따라 드롱이 세차를 하러 갔던 날이었다. 새로운 세차용품들을 마련할 때마다 상기된 표정으로 신나게 자랑하던 오빠가 잊히질 않는다. A부터 Z까지 없는 게 없는 세차용품들을 트렁크에 한아름 싣고 집 앞 세차장에 도착했다. 오빠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고, 우리는 부지런히 팔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냥 2시간이면 끝나겠거니 했다. 하지만 웬걸, 밤 10시쯤 시작한 세차는 2시간을 훌쩍 지나 어느덧 새벽 세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장장 5시간을 오빠와 함께 차를 닦다 결국엔 너무 힘들어서 차 안에서 잠깐 쉰다는 게 그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멋모르고 따라갔다가 세차 신고식을 호되게 치른 셈이었다. 우리는 새벽 세시가 넘어서 끝난 세차 대장정에 두 손 두 발 다 들며 다시는 손세차를 하지 않겠다고, 돈 주고 맡기고 말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세차 굴레는 끝나지 않은 채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






붕붕이와 드롱이의 만남

커플 세차 대작전


우선 내 차 붕붕이를 소개하자면 2010년형 중고차로, 지금까지 10년을 넘게 여기저기를 누벼온 나이 든 차이다. 자그마치 17만 킬로미터를 도로 위에서 지낸 터라 여기저기 탈도 많이 나는 바람에 정비소에도 여럿 드나들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멀쩡하게 잘 타고 있다.


도대체 하늘에선 어떻게 이렇게 많은 물이 쏟아질 수가 있나... 할 정도로 비가 오던 어느 날, 오빠는 내 차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유, 이거 유막 제거도 하고 광도 좀 내고 해야겠네!"

"유막 제거?"

"응, 이거 비올 때 편하게 다니려면 유막 제거하면 좋아. 조만간에 오빠랑 세차 가자."

어쩐지, 그래서 비 올 때 불편했구나!

차에 대해 아직은 모르는 것들이 꽤 많은 나는, 이참에 그동안 신경 써주지 못했던 붕붕이 목욕이나 시켜주러 가기로 마음을 먹고 주말에 세차 데이트를 약속한 뒤 헤어졌다.


 




드디어 세차를 하기로 한 당일. 덥고 습한 날씨에 한번 기겁하고, 신경 쓰지 못한 새에 더 더러워진 붕붕이의 상태에 두 번 기겁하며 차의 상태를 살폈다. 지하주차장이 따로 없는 우리 아파트는, 지상에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있어서 여름이 되면 벌레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새들은 열심히 붕붕이의 머리 위로 똥을 싸 대고, 거미들은 어디서 이렇게 기어올라온 건지 열심히 백미러에 거미줄을 쳐놨다. 바람이라도 훅- 불면 후드득 떨어지는 열매들로 인해 붕붕이 머리 위는 초록색 이파리와 열매들로 가득했다. 에휴, 요놈을 언제 다 목욕하나... 하면서도 속 시원하게 깨끗해질 붕붕이를 상상하며 세차장으로 출발했다.


비포 에프터를 남기기 위해 찍은 목욕 전 꼬질꼬질 붕붕이


주말 세차장에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저녁 일곱 시 무렵의 세차장은 세차를 하러 온 커플들로 북적였다. 다들 세차 데이트를 많이 하는구나... 생각하며 이내 주차를 마친 뒤, 곧바로 세차에 돌입했다.



차를 주차하자 멀리서 먼저 실내 청소를 하고 있던 오빠가 다가와 코칭을 시작했다.

"자, 이예령 씨 준비되셨나요?"

"옙!"






STEP1

우선 물로 한 번 싹 샤워하기!



우선 혹독한 지상 생활로 인해 더럽혀진 몸부터 물로 싹 헹궈내야 했다. 머리부터 바퀴 끝까지! 꼼꼼하게 물을 뿌려주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단계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신나게 물을 뿌렸다. 쏴아아- 힘차고 곧게 뻗어나가는 물줄기를 붕붕이에게 쏘아주며 왠지 모를 시원함이 느껴졌다. 묵은 때가 한 번에 싹 씻겨나갈 때마다 내 걱정들도 강한 물줄기를 타고 말끔하게 씻겨나가는 듯한 쾌감을 느꼈다. 이 맛에 모두가 세차를 하는 건가? 생각하며 꼼꼼하게 1차 세차를 마쳤다.



STEP2

있는 힘껏 때를 밀어라!


"다했어? 자 그럼 이제 바퀴를 닦아볼까?"

올 것이 왔구나! 진짜 세차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이전에 드롱이 세차를 하러 따라갔다가 손이 빠지도록 타이어를 닦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늘은 붕붕이 바퀴를 손이 빠지도록 닦을 차례다. 우선 타이어 전용 세척제를 바퀴에 고루 뿌려주었다.



"흐익-!"

바퀴를 뿌리자마자 더럽게 물들여지는 거품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내가 바퀴를 이렇게나 안 닦았었구나. 1년 반이 넘도록 타고 다니면서 사람으로 치면 발과도 같은 바퀴를 이렇게나 오래 닦지 않았었다니. 새삼 반성하게 되는 바퀴의 상태에 절로 빠르게 손이 움직였다. 솔로 바퀴 휠과 타이어 겉면을 열심히 문질러주었다.

때야 빠져라!


바퀴를 손이 빠져라 문지르고 나면, 다음은 몸통을 닦아줄 차례다. 스펀지를 조물조물한 뒤, 몽글몽글한 거품들을 차 전체에 문지르며 닦았다. 마치 내 몸을 닦듯이 구석구석 꼼꼼하게 문질렀다. 주유소 세차를 할 때는 알아서 착착 건조까지 해주니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내 힘을 들여 닦아주니 그동안 부족했던 붕붕이에 대한 애정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열심히 닦고 있던 찰나, 옆 칸에서 물을 뿌리는 소리와 함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즐겁게 세차를 하고 있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더욱 열심히 세차에 몰입했다.



STEP 3

때 뺐으니, 광 낼 차례!


이제 막 물만 끼얹었을 뿐인데 슬슬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덥고 습한 날씨에 벌레들은 자꾸만 들러붙고 온 몸이 땀으로 끈적이기 시작했다. 점점 속도가 느려지는 나를 발견하곤 저 멀리서 오빠가 소리쳤다.

"이제 광내야지! 너도 붕붕이를 아껴주란 말이야!"

그래, 붕붕이가 여기저기 데려다주느라 고생하는데 열심히 아껴줘야지. 자, 이제 깨끗이 때를 뺐으니 광을 내줄 차례다. 우선, 차에 묻은 물기를 깔끔하게 닦아주었다. 그 후 마른 수건에 차량용 광택제를 묻혀 팔이 빠지도록 원을 그리며 광을 내주었다. 문지르는 만큼 붕붕이가 반짝거리기 때문에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온 마음을 담아 정-말 열심히 문질렀다.


여전히 잔기스들은 많지만 열심히 닦아 반짝거리는 붕붕이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창문과 바퀴도 예외는 없다. 유리 광택제와 타이어 광택제를 묻혀 열심히 문지른다. 나중에는 힘든 것도 잊고 그저 광을 내는 데에만 집중하며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다보니 신기하게 잡생각들도 사라졌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광을 내주다 잠시 한 숨을 돌리려 허리를 들어 창문을 보니 깨끗하게 빛나는 차창 위로 멍 때리며 닦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간은 오후 열 시를 넘겼고, 세차만 세 시간 째였다. 맙소사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갈 수 있다니. 잡생각이 많이 들 때면 앞으로 자주 세차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지럽게 괴롭히는 잡생각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역시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답이었다.


빛나는 차창과
한결 깨끗해진 타이어


세차의 마지막 단계인 실내 청소까지 깔끔하게 마쳤다. 좌석 시트와 핸들까지 꼼꼼하게 닦고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광을 내주었다. 장장 세 시간 반이 넘는 붕붕이 목욕을 마친 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노곤노곤 피곤하기까지 했다. 그때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정신없이 드롱이를 광내고 있는 남자 친구부터 시작해서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닦는 사람과, 함께 차를 목욕시키던 여럿 커플들까지. 다들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세차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들 쉽게 세차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손으로 직접 세차를 하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조금은 번거롭고 귀찮지만 또 그만큼의 보람과 각자 느끼는 무언가를 얻어가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꼬질꼬질 붕붕이에서 제법 광이나는 붕붕이로 환골탈태했다.






세차, 그 후

애정을 주니, 더 부드러워진 붕붕이


어차피 더러워질 타이어에도 광을 내야 되냐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던 내게 오빠는 이렇게 답했다.

"령아, 이거 타이어도 주기적으로 닦아주면 더 부드럽게 잘 나간다?"

에이...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나였는데, 세차를 한 뒤 나는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어딘가 빡빡한 느낌이 들었던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가는 느낌이 들자 '오!'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마치 새 차를 탄 것만 같은 부드러운 주행이 새로웠다. 역시, 신경을 써주는 만큼 차는 보답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내 차와 마찬가지로 아빠의 차, 카니발 또한 출시된 지 10년이 넘은 오래된 차이다. 집안 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차를 판 뒤 얻게 된 카니발인데, 아빠는 여기저기 고장 나있던 차의 아픈 곳들을 손수 하나씩 정비해주었다. 그런 아빠는 나에게 종종 '손이 닿은 곳이 많아서 그런가 뭔가 특별하다'며 애정 어린듯한 발언을 하시곤 했다. 동네 가까운 곳에 갈 때에는 큰 차인 카니발보다 작은 차인 내 차를 더욱 많이 이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용 횟수가 적어지자 차를 팔아야 하나 고민도 하셨다. 하지만 아빠는 손길이 서린 카니발을 쉽게 팔지 못하고 결국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에 이렇게 애정이 갈 수 있나?' 하며 속으로 혼자 의아해했지만 직접 차를 닦고 난 후, 이제는 조금 그 느낌을 알 것도 같았다.


세차 후, 일주일 즈음 지난 오늘. 거센 장맛비가 내렸고, 또다시 새들은 붕붕이의 머리 위에 똥을 싸 댔다. 일주일만에 더러워졌지만 그래도 뭐, 이 참에 또 세차하러 가면 되지!라고 생각하면 불편했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더러워지면 깨끗하게 씻으면 그만이다. 세차도 하고, 머릿속도 비우고, 시간도 때우고, 데이트도 하고. 몸은 힘들지만 이래저래 손해인 세차는 아니었다.


이번 붕붕이 목욕을 통해, 애정을 쏟은 만큼 그 보람도는 크다는 걸 깨달았다.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내가 자주 사용하는 것들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소한 것 하나가 의미를 갖기 시작하면 내가 생각했던 뻔한 정의도 재미있게 바뀌기 때문이다. '세차는 그냥 차를 깨끗하게 하는 거지 뭐'라고 생각했던 나의 뻔한 정의가 '붕붕이 목욕시키기'라는 귀여운 행위가 된 것처럼 말이다. 소름 돋도록 똑같은 일상에 약간의 관심을 주니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렇게 지겨운 일상이 조금은 재미있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변화하며 살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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