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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Mar 24. 2022

꼬불꼬불 글씨가 나를 울렸다

엄마의 편지는 왜 항상 이렇게 눈물이 나올까?



엄마는 나의 편지 메이트

어떤 감정이든, 어떤 이야기든 OK!


초등학교 시절부터 엄마와 나는 비밀 다이어리를 쓰곤 했었다. 2006년 즈음이었나? 학교 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작은 자물쇠로 서로의 비밀들을 꽁꽁 간직한 비밀 다이어리가 오가곤 했다. 각자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베프에게 건네는 나의 하루, 그리고 나의 비밀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볼 새라 눈치를 보며 빠르게 적어나간 비밀 편지들을 친구에게 전해주고 또 전해받았던 아련한 날들이 있었다.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 혹은 친구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손으로 꾹꾹 눌러 담아 친구의 손에 건넸던 그 옛 것의 감성들이 가끔씩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도 몇 명의 친구들과 돌아가면서 비밀 다이어리를 적은 적이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나의 베스트 비밀 메이트는 바로 '엄마'였다. 작은 스프링 노트에 오늘 반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엄마에게 혼났을 때는 어떤 점들이 서운했는지 오밀조밀한 글씨로 빼곡히 적어 엄마에게 전하곤 했었다. 편지의 끝에는 '엄마 그리고 비밀인데요, 엄마 사랑해요.'라고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바쁘게 집안일을 하는데도 언제 편지를 쓸 시간이 있었는지 금세 답장을 적어 나에게 건넸다. 아마도 어린 내가 고이 잠든 시간에 노랗게 빛나는 식탁 불 아래에서 꾹꾹 눌러 적었겠지? 아, 엄마도 편지의 끝엔 꼭 이렇게 적곤 했다.

'엄마도 사랑한다~ 얼만큼? 하늘만큼 땅! 땅! 땅만큼!'


편지에는 신기한 힘이 있다. 말로 직접 전하지 못했던 마음들은 '편지'라는 종이에 적히며 펜을 따라 그 진정성이 묻어난다. 얼굴을 보면 그렇게 나오지 않던 말들이 편지 위에 글을 올리는 순간 마치 천재 작가라도 된 듯 줄줄이 써진다. 그래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편지를 좋아한다. 손편지가 더욱 귀해지는 요즘, 편지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함을 잊을까 나는 가끔 편지를 쓴다.






편지에 담긴 그날의 시간들


2005.01.06(목)

"예령이가 동시를 너무 예쁘게 잘 짓던데 공부도 그렇게 자신 있게 했으면 좋겠다. 동시도 네가 자신 있게 하니까 그렇게 예쁜 글이 탄생한 거야. 알았지? 책 속의 글과 그림을 많이 보다 보면 예령이도 멋진 글과 그림이 탄생할 거야.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예령이의 글과 그림을 보고 놀랄 일만 있을 거다. 우리 앞으로 잘하자! 아자!"


2005.04.18(월)

"예령아 안녕? 어제 우리 모두 같이 향기 속에 파묻히고 신났었지? 예령이가 예쁜 시 지은 것처럼 엄마도 그랬는데. 예령이 동시 정말 잘 짓는다. 엄마는 진짜 감동했다니까? 그때를 그림으로 그리듯 시로도 예령이 마음이 잘 표현된 것 같아서 너무 기뻤어. 예령아 이러다가 초등학교 시인 나오겠다."


2006.03.13(월)

"얼마 전에 내린 눈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니 오늘 또 하얗게 예쁜 눈이 내렸어. 나뭇가지마다 예쁜 눈꽃들이 펴있고, 엄마 머리 위에도 하얗게 색칠했네? 바닥엔 누군지 모를 여러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무늬가 되어있었어. 예령이도 학교에서 눈 내리는 거 봤지? 또 예쁜 시가 떠오르지 않았니? 예령이는 예쁜 동시, 재미있는 동시 지을 때처럼 좋은 생각만 많이 하길 바랄게. 가슴 찡한 시도 지어보고 화가 날 때도 지어보고. 혹시 알아? 어린 시인이 되어서 스타가 될지. 이미 엄마한테는 최고이고 스타야. 나중에 예쁜 싸인 완성되면 제일 먼저 엄마한테 부탁해!"


내가 이렇게 하루동안 본 것들에 대해 시를 적으면
엄마는 항상 있는 힘껏 응원과 칭찬을 담았다.
엄마는 항상 초등학교 시인이 나오겠다며 특급 칭찬을 해주곤 했다.
여덟 살의 꼬꼬마 이예령에게도 엄마의 마음이 무사히 닿았나보다.


엄마의 편지에는 곳곳에 응원과 미안함, 안쓰러움 등의 많은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마냥 어리기만 했던 여덟 살의 나는 엄마의 이런 따뜻한 말들을 어떻게 느꼈을까? 훌쩍 커서 읽으니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졸린 눈을 꿈뻑이며 편지를 적어 내려 갔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엄마의 큰소리에 엉엉 우는 나를 보며 들었던 미안하고 불쌍하기도 한 마음, 마음대로 공부가 되지 않아 밤마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나를 엿보며 들었던 걱정되는 마음, 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포기하지 않도록 열심히 응원해주는 것까지. 엄마는 작은 꼬마가 어여쁘게 자랄 수 있도록 열심히 예쁜 말들을 퍼부어주고 있었다.


가끔씩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내가 좋아하고 있는 글이 정말 나의 직업이 될 수 있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지 의아해지곤 하면 엄마와의 편지를 돌아본다. 어린 나에게 열심히 심어주었던 엄마의 작은 응원들은 그렇게 지금의 나에게까지 자라나고 있다. 특별한 추억이 없을 수도 있었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시절을 편지는 이렇게나 소중히 담고 있다.






엄마의 편지는 내 눈물 버튼

강렬하게 기억나는 그날의 눈물


어릴 때 엄마의 곁에서 떨어져 수련회를 가는 날이면 왜인지 모르게 신나는 마음보다는 걱정되는 마음이 컸었다. 가족이 있는 편안하고 따뜻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친구들과 수련도 하고 잠도 자야 한다는 사실이 어릴 적의 나에게는 낯선 무서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일곱 살 무렵, 유치원에서 원장 선생님네 집으로 하루 동안 견학을 간 기억이 어렴풋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하얀 마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당 곳곳에 빨간 사과가 달린 사과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마치 평화로운 동화 속 마을에 온 것 같은, 그런 집이었다. 어릴 때라 그런지 그날의 모든 것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딱 하나, 이것만은 기억난다. 수련회의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의 사랑'을 회상하는 일. 그날도 어림없이 선생님과 아이들이 노란 불빛의 무드등이 켜진 작은 방 안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엄마의 편지를 낭독했다.


내 차례가 오고, 나는 작은 손으로 천천히 사과 모양으로 정성스럽게 자르고 꾸민 엄마의 편지를 집어 들었을 것이다. 편지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의 편지를 낭독할 때마다 열심히 울먹이며 한 줄씩 읽어 내려갔던 기억은 선명하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단지 음성이 아닌 글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편지는 마치 내 앞에서 내 눈을 마주 보고 말하는 듯 선명했다. 그 편지에도 역시 엄마는 이렇게 적었겠지.

'우리 예령이,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한다.'






꼬불꼬불 우리 엄마 편지

그래서 더 눈물이 차올랐던 어느 날


2021년 12월, 한 해의 끝을 바라보는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매서운 칼바람과 함께 소복한 눈이 내렸다. 크리스마스는 어김없이 한 해를 돌아 다가왔고,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연말을 보내며 2022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우리 가족도 어김없이 평범한 하루이지만 마음만큼은 묘한 연말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예령아, 너네 오빠 선물하나 해줄까 하는데 뭐가 좋을까?"

하루는 엄마와 백화점에서 옷을 둘러보다가 대뜸 나에게 의견을 물었다. 엄마는 어느덧 5년이 다되어가는 긴 시간 동안 딸을 예쁘게 사랑해 준 나의 남자 친구에게 연말 선물을 전해주고 싶어 하셨다.

"글쎄? 오빠 잠옷이 없긴 한데."

"그래? 그럼 잠옷 예쁜 거 보이면 말해봐. 사줄게."


그날, 나와 엄마는 남자친구에게 어울릴만한 하늘색 잠옷을 골랐다. 집에 오니, 동생도 함께 선물하고 싶다고 말을 건넸다. 어쩌다 보니 세 모녀가 동시에 남자 친구에게 연말 선물을 건네게 된 바람에 조금은 기분이 좋기도 했다. 날은 추워도 누군가에게 전하는 따뜻한 마음만큼은 확실한 겨울이었다. 모두의 선물을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쇼핑백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나의 편지와 곁들여 엄마와 동생도 작은 편지장에 짧게 마음을 담았다. 엄마는 오랜만에 편지를 쓰니 눈이 안 좋아서 글씨가 하나도 안 보인다며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정성 하나만큼은 푸짐한 우리의 선물은 무사히 남자 친구의 손에 전달되었다.


그날 저녁, 남자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엄마가 편지에 어떤 내용을 적었는지 궁금해졌다. 엄마가 남자 친구에게만 전하는 비밀스러운 내용일까 봐 일부러 읽어보지 않았었는데, 평소 엄마에게 미주알고주알 남자 친구 이야기를 많이 했던 터라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레 편지를 열었다. 귀엽게 적은 동생의 편지 한 켠 옆에 엄마의 편지가 보였다.


"사업하느라 많이 힘들죠? 힘들어도 항상 건강 챙기면서 일해요. 못난 우리 딸 변함없이 예쁘게 사랑해줘서 항상 고마워요^^ 선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거라... Happy New Year!"

꼬불꼬불해진 글씨, 한 줄로 맞지 않는 열, 내가 항상 봐왔던 익숙한 엄마 글씨체. 단지 이 세 가지만으로 나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 차올랐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오랜만에 편지지에 펜을 올린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다. 집중할 때마다 나오곤 하는 특유의 표정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꾹꾹 눌러쓴 글씨를 보았다. 글씨 위에는 야속한 세월 덕에 침침해진 눈으로 천천히 마음을 전하기 위해 눌러쓴 엄마의 마음이 그려졌다.



언젠가 엄마가 그랬다.

"네가 언제 이렇게 커서 시집갈 때가 다가왔냐."

주말에 엄마와 산에 오를 때마다 나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건네곤 했다. 남자 친구와 뭘 하고 놀았는지, 남자 친구가 건넨 무슨 말에 기분이 그리 좋았는지, 쉼 없이 조잘대는 큰 딸의 이야기들을 그저 웃으며 들어준 엄마였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런 엄마의 모습을 그리니 그냥 눈물이 흘렀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남자친구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꼭 안아줬다. 정말, 나도 참 눈물이 많다.


이제 와서 엄마의 편지들을 읽어보며 그날들을 상상하면 편지에는 엄마의 인생이 녹아있기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를 탔을 때 엄마가 얼마나 뿌듯해했을지, 동생을 챙기는 내 모습을 보고 다 컸다고 칭찬하며 그 시절 나름대로 흘렀던 빠른 세월을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실감했을지,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아 밤마다 머리를 싸매는 나를 몰래 엿보며 걱정했던 마음들.


엄마는 모를 거다. 내가 엄마의 편지에 얼마나 많이 눈물을 글썽거리는지. 그거 하나만큼은 분명하다고 전하고 싶다. 엄마가 그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 하나만큼은 잘 전해지고 있다고. 편지에 담긴 시간이 2005년이든 2021년이든 말이다.


진솔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 소중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적어보자. 잊히고 싶지 않은 귀한 추억들이 편지 속에 앉으면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그 모습과 마음을 담고 있을 테니까.






이 글을 보는 나의 하나뿐인 '감성 시인'에게 보내는 P.S

엄마, 나도 사랑해! 얼만큼? 하늘만큼 땅! 땅! 땅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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