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엔 항상 너희가 있었다.
유일하게 걱정이 사라지던 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장 나다운 시간
오랜만에 이런 감정을 느꼈다. 아니, 사실 처음 느낀 것 같기도 하다. '살아있는 것 같은 감정' 말이다. 가장 나다운 나를 내 눈으로 맞이한 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나게 되어 지금까지도 가깝게 지내는 절친에게, 어느 날 아침 급하게 전화가 왔다. 평소 서로 바쁜 탓에 전화를 통 하지 못해서 정말 오랜만에 친구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 년이 다 되도록 얼굴을 보지 못해 그런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쾌하고 나긋한 목소리를 가진 반가운 친구의 목소리였다.
"예령아! 내가 피부관리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혹시 괜찮다면 피부 모델을 부탁해도 될까...?!"
정신없이 나갈 채비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부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에, 모델? 어떤 거 하는 건데?"
오랜만에 들은 친구의 새로운 근황에 너무나도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나도 친구도 급한 상황이라 미처 물어보지 못했었다. 뭐가 되었든 친구의 새로운 도전인데, 당연히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시험 전, 몇 번의 연습이 필요했기에 2주에 걸친 연습 스케줄을 잡고 첫 번째 연습일로 그 주 주말에 친구네 집에서 보기로 약속을 잡았다.
아직 4월인데 때 이른 초여름 날씨를 자랑이라도 하듯 오전부터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토요일이었다. 햇볕도 쬘 겸 운동삼아 친구네 집으로 걸어가기 위해 한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을 볼 생각에 전 날부터 들떠 있었던 나였다. 매일 카톡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얘기하고 싶고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느새 친구네 집 앞에 도착한 나는, 때마침 걸려온 친구의 전화에 도착사실을 알렸다.
"좀만 기다려! 금방 나갈게!"
몇 분 뒤, 아파트 도어록 문이 열리고 친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
우리는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으며 서로를 반겼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만나자마자 서로 입이 터져버렸다. 토크쇼를 하듯 서로의 입이 쉬질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친구의 어머니가 반갑게 반겨주셨다. 슬쩍 보이는 방 안에서 꾸벅 인사를 건네는 친구의 동생은 어느새 세월이 지나 몰라볼 만큼 훌쩍 키가 커져있었다. 모두가 오랜만이었다. 문득, 고등학교 졸업식 때 친구네 가족들을 뵈었던 옛 생각이 스쳐갔다. 그때도, 지금도 친구네 가족을 마주하면 항상 보는 사람까지 기분이 좋아지는 밝은 에너지가 전해졌다.
연습을 준비하면서부터 연습을 하면서도 할 말이 너무나 많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너무 웃겨서 '컹!' 돼지코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웃어댔다.
"야! 예령아, 이거 팩 다 흘러서 웃으면 안돼에!!!"
"아니 그냥 너무 웃긴데 어떡해!!"
친구가 붓으로 얼굴에 팩을 발라주며 인중을 스윽 지나가는 것조차 그냥 너무 웃겼다. 그 순간에는 정말 낙엽만 굴러가도 웃어대는 고등학생들 같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어떻게 피부관리 자격증을 준비하게 되었는지, 남자 친구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금은 뭘 하고 지내는지, 친구들 이야기 등 그동안 톡으로는 자세히 듣지 못했던 친구의 이야기들을 듣고 나의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전부터 이유도 모르게 무언가에 침체되어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우중충했던 기분이 신기하게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 순간, 곪았던 무언가가 터지듯 시원해졌다.
아무 걱정 없이 놀고 떠들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쉬는 시간이 되면 물 마시러, 매점에 가러, 화장실을 가러 친구와 팔짱을 끼고 교실 문 밖을 나서던 그날이 떠올랐다. 기분이 좋았던 날에도, 기분이 안 좋던 날에도 언제나 나를 받쳐주듯 지지해주던 든든한 내 친구들의 팔이 있었다. 근심 걱정이 워낙 많은 나여서 때로는 멘털이 무너지는 날이 많았지만, 항상 내 편인 친구들이 있었다. 걱정을 질질 끌 틈도 없이, 마음껏 울어도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소중한 내 사람들이다. 이젠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친구들과 고민, 걱정 그리고 기쁜 일들을 얼굴을 마주하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더욱 귀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다운되는 날들이 많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약속을 잡는 날이면 나는 항상 하고 싶었던 말들을 꾹꾹 주머니에 담아 친구들을 만나던 날 한꺼번에 풀어내곤 했다. 내 이야기이지만 본인의 이야기인 듯 공감하며 들어주는 든든한 친구들을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아졌다. 돌이켜와서 깨달았지만 친구들과의 수다가 내 스트레스를 탈피할 유일한 약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 다닐 때 엄마가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나중에 어른되어봐라,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웠고 제일 좋을 때였다는 거 뼈저리게 느낄 거다."
역시, 엄마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나는 지금 그때를 뼈저리게 그리워하고 있다.
어떻게 피부관리사 자격증을 준비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듣다가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싫어서 무언가를 계속 배우면서 살고 싶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 좋아하는 것들을 도전해가면서 나를 발전시키고 싶어."
"오, 그래? 나는 어느 정도의 능력이 되면 소소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을 것 같아."
답을 하면서도 친구의 이야기에 뭔가 속에서 찌릿하고 엔도르핀이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나중에 충분히 돈을 벌어서 모으게 되면, 동생과 함께 카페나 독립서점을 차려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조용한 삶을 살길 꿈꿨다. 대학시절 대외활동이나, 과제를 할 때에도 개인의 성과보단 다수의 협력으로 인한 성과가 더 값지게 다가왔던 나는, 싸늘한 현실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독히도 경쟁을 하는 것에 쉽게 두려워하고 스트레스를 받아했다.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당연히 넘어야 될 산들이지만, 그 산들에 비해 나는 여전히 작다고만 느껴졌다. 매번 그 순간들이 오면 자신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게 지배하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훗날 나이가 들어서는 조금 벌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마음의 안정을 택하리라 마음먹곤 했었다.
하지만 참 나도 나를 모르겠는 게, 지금의 나는 마음의 여유가 찾아오면 그 여유를 온전히 행복이라 느끼진 못했다. 어딘가 불안하고, 정말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는 건지 걱정이 물밀듯 밀려와 머리를 어지럽혔다. 한 개의 대외활동이 끝나면 그 공백이 불안해 또 다른 대외활동에 도전했다. 왕복 세 시간 반을 자랑하며 내 시간 없는 빡빡한 통근으로 바쁜 일과를 보낼 때는 그렇게 싫다가도, 퇴사 후 잠시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그때보다는 조금의 여유가 찾아온 지금으로서는 또 그렇게 바쁘게 살았던 게 맞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나도 이런데, 훗날의 나는 과연 어떨까 생각하면 더 답이 없었다. 더 무언가 해야 하고, 성취감이라는 밥을 먹으며 나를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약간의 강박감이 있는 듯했다. 아직까지는 여유를 온전히 즐길 짬바가 되진 않나 보다. 좋아하는 일이든, 해야 하는 일이든 꾸준하고 열심히 계속 무언가를 쌓아 가다 보면 언젠가는 튼튼한 곳에서 여유를 즐길 여유가 생길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나에게 친구의 한마디는 어지러웠던 내 기준을 바로 세울 수 있었던 울림을 주었다. '부지런한 삶을 살자.' 다짐했다. '안정된 삶이더라도 나태해지진 않는, 작은 것이라도 변화하려 노력해보는 그런 부지런한 삶.' 그게 바로 마음의 안정도 갖고 싶고 어느 정도의 성취감도 챙기고 싶은 나에게 딱 필요한 처방이었다. 그날, 친구와의 이야기를 통해 복잡히 얽힌 나를 조금은 풀어낼 수 있었다.
연습을 마치고 헤어진 후, 친구의 남자 친구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요즘 예령이 자주 보니까 너 표정도 너무 좋아 보이네!"
친구에게 이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바로 오늘 느꼈던 그 기분이 들었다. 친구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 믿는다. 내 사람들과 서로의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그 속에서 한걸음 나를 찾아갈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되고, 살아있음을 느꼈다. 이 글을 읽게 될 내 친구에게 다시 한 번고마움을 표한다.
'나'라는 인간을 돌리는 활력소들
그건 바로 내 사람들.
요즘같이 선선하니 날이 좋은 날에는 가끔씩 친구를 만나 친구네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곤 한다. 동네 친구 좋다는 게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동네 한 바퀴 슬슬 걸으며 어느 날에는 강아지와 차츰 교감을 쌓기도 하고, 서로의 고민거리를 풀어내기도 하며 소소한 위로를 건네고 행복을 챙긴다.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과 함께 버리기도 하며 그렇게 조금이나마 머리를 가볍게 만든다. 그저 들어주었을 뿐인데 고맙다며 말 한마디 건네는 친구를 보며,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퇴근길마다 전화를 거는 또 다른 친구도 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들, 마음 상했던 일들, 저녁밥에는 뭘 먹어야 할지, 남자 친구와는 주말에 뭘 했었는지 등 일상의 한 부분을 편하게 털어놓곤 한다.
"저녁 뭐 먹게?"
"나 가는 길에 호떡 하나 사서 들어가려고!"
집에 가는 길마다 호떡을 한 개씩 사가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휴대폰 너머의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작은 트럭 앞에 서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호떡을 기다릴 친구의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기도 한다. 지치고 힘들 수 있는 퇴근길이 잠시나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인해 웃음으로 채워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도 그런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힘들었던 하루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음에 뿌듯해한다.
항상 되새기지만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최종의 목표가 있다.
'내 사람들에게만큼은 꼭 죽을 때까지 잘하자.'
언제나 내게 힘이 되었던 건, 나를 잃지 않도록 있는 그대로 위해주고 아껴주는 내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만큼은 온전한 나를 보여줄 수 있었다.
주말에 맛있는 고깃집에 데려가 밥 한 끼 사주겠다고 호탕하게 말하던 친구는 비싸다고 같이 나눠내자며 손사래 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유 괜찮아, 내가 원래 짠순이인데 아끼는 내 친구한테 쓰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까워!"
'너에게 쓰는 돈은 하나도 안 아깝다'라는 말 한마디에 묵직한 친구의 마음이 그대로 와닿았다. 나도 가끔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안 아깝다'는 말 한마디는, 건네면서도 들으면서도 참 듣기 좋고, 고마운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지갑이 가벼웠던 지난날보다는 내 사람들에게 더 좋은 것과 맛있는 것을 사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고 굴러가게 만들어주는 내 사람들을 너무나 아낀다. 후회하지 않도록 아끼고, 아낄 것이다.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항상 하는 농담이 있다.
"야, 우리 나중에 늙으면 실버타운 지어서 층 나눠가지고 같이 살면서 맨날 놀자! 재미있을 것 같지 않냐?"
정말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열심히 살아서 훗날 편하게 살기까지! 오래오래 서로에게 기대고 쉬어가며 살아가길 다짐하고 그려보며 행복한 상상에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