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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Nov 23. 2023

내가 기억하는

하루 중 가장 따스한 시간



[완벽한 오후]

바닥을 노랗게 물들이며
따스한 햇살이 배어들어온다

창문 모양의 결을 따라
바닥 위에 겹겹이 포개어진다

방 안을 은은하게 데우는 온기에
스르륵 눈이 감겨온다

일정 없는 하루,
누워있는 몸 위를 포개는 나른함,
살포시 감은 눈

완벽한 오후다

-2023년 11월의 어느 날-




요 근래 11월답지 않게 푹하던 날씨가 뒤통수라도 치듯 서늘한 겨울바람을 몰고 왔다. 가을은 특유의 포근함을 충분히 느낄 새도 없이 물러가버렸지만, 짧았기에 더욱 소중했던 날들이었는지 모르겠다.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지만, 여름 못지않게 좋아하는 계절은 바로 가을이다. 물러나려는 여름을 잠시나마 붙잡아두기라도 하듯 낮에는 맑고도 뜨겁게 온도를 데운다. 여름의 뜨겁고 습한 공기와는 또 다르게 타오르는 느낌에 청량하다.


나는 올해, 그런 가을 햇살을 좋아했다. 일을 하다가 눈이 지쳐갈 때쯤인 오후 3시, 나는 고개를 빼꼼 들어 창너머로 보이던 나무 한그루를 보았다. 9월엔 푸른색을 띠며 우뚝 서있더니, 10월이 되자 가을 햇볕에 익어 그새 나무의 끝이 노란빛을 띠었다. 나는 일을 하다 한 번씩 온몸으로 가을을 맞고 있는 그 고요한 나무 한그루를 쳐다봤다. 가을이 부쩍 짧아진 탓에 붉은 잎은 보기 귀해졌으니, 이제는 앙상한 몸으로 같은 자리를 지키겠구나. 생각했다.



그런 따스함을 가진 가을햇살이라 그런지, 가을빛이 배어들어오던 오후는 방 전체에 그 온도를 나누었다. 아무 일정도 없는 주말, 거실에 따뜻한 그림자를 드리우던 그 햇살과, 일을 하며 더욱 귀해진 주말을 즐기던 오후. 나는 그 여유로움이 주던 여운을 올해의 가을이라 기억하기로 했다.


그런 오렌지빛을 항상 느끼고 싶어 만든 몇 가지 로망도 있다. 나중에 내 집을 마련하는 순간이 온다면 반드시 창이 크고 해가 잘 들어올 것. 내가 굳이 찾지 않아도 하루의 해가 뜨고 지는 순간의 따스함을 느끼고 싶어서가 가장 큰 이유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무엇보다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 매일을 열심히 살아야겠지. 생각해 본다.




요즘은 하루의 반나절을 넘도록 사무실에 있다 보니, 일상의 틈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유로움에 계속 눈길이 간다. 이를테면 점심을 먹고 나와 회사로 걸어가는 좁은 골목길을 비추는 햇살길이라던지, 회사 옆 작은 산책길 너머 흐르는 강을 보며 걷는다던가 하는 일들. 이유 없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유유하게 흘러가는 것들 말이다.


어제는 함께 일하는 동료와 산책을 하며 일부러 해가 든 곳만 찾아서 걸었다. 어느덧 퍽 추워진 겨울공기가 익숙하지 않아서도 있지만, 햇살이 비추는 길을 걸으니 추워 움츠러들었던 등이 펴지고 걸음에 여유가 생겼다. 어쩌면 우리에겐 잠시의 시간 동안 편안한 걸음으로 거리를 걷는 여유라는 게 필요했는지 모른다. 앞으로 더욱 추워져 걷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질까 요즘은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인다.


하늘 한번 올려다보기도 힘든 세상이라는 말이 맞다는 것을 요즘 들어 체감한다. 통창으로 되어있는 사무실에는 매일 오후 4시, 절정을 그리는 햇살이 같은 자리를 비추고 사라진다. 바닥을 비추던 그림자가 사라지면 나는 스치듯 생각한다.


‘오늘 하루도 다 갔구나’



그래서인지 일상에서 영감을 얻어 자주 글을 적던 나는 어딘가 계속 메마른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 글을 써야지 ‘ 하다가도 이내 ‘뭘 써야 하지?’라는 답을 돌려받고 있는 요즘. 매일 같이 뜨고 지는 평범한 것에 불과할지라도 둔하게 굳어있던 손가락을 움직이게 해 준 햇살에 고마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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