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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Dec 23. 2021

02. 탓할 건 나밖에 없어서

난 왜 항상 잘할 수 있다고 다짐하면 더 무너질까



[EP02]

일주일, 그저 좋던 날들.

2021. 04. 19


AM 8:20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여느 날처럼 북적이는 사람들과 몸을 비비며 출근을 하는 그 힘듦을 나는 즐기고 있었다. 눈은 감기더라도 지하철 출구 계단을 올라가는 내 걸음만큼은, 적어도 축 처진 어깨로 출근하는 많은 출근러들과는 다르게 당당했다.


신입 교육을 마쳤던 일주일 차에는 서서히 작은 업무들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입사 후, 콘텐츠 마케터로서 주어진 첫 업무는 알림 톡 기획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매일 받아보기만 했던 알림 톡을 직접 제작한다고?'

새로움은 언제나 짜릿한 법. 신기한 맘 반 열정 반으로 알림 톡의 이미지와 함께 보낼 멘션을 뚝딱 기획했다.


AM 11:30


"예령님은 문구 기획을 잘하시는 것 같아요."

회의 시간, 찬찬히 나의 기획안을 살펴보시던 팀장님의 첫 칭찬이었다. 평소 좋아하고 잘하고 싶어 했던 "글"에 대한 누군가의 칭찬을 받았던 첫 순간이었다. 핵심적인 문구들을 골라 이벤트를 알리고, 고객의 유입을 필요로 했던 알림 톡 기획. 문구를 기획하며 그 누구보다 열정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던 나였기에 칭찬은 그야말로 그날의 기분으로 정의되었다. 작은 칭찬이지만 내가 들었던 그 짧은 말은 충분히 그 하루의 기분을 대표할 만큼 큰 자극이 되었다.


[EP03]

좋아하는 일은 잘하게 되는 걸까?

2021.05.11


입사 한 달 차.


콘텐츠 마케터. 소비자와 가장 가깝게 "콘텐츠"라는 매개체를 통해 소통하는 접점을 만들어가는 직업이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소비자와 소통하기 위해, 나는 콘텐츠 스토리텔링과 인스타그램 이벤트들을 기획하고, 서포트했다. 브랜드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곤 했는데, 나는 캐릭터를 통해 스토리를 다양화시켜 소비자들이 우리 브랜드에 더욱 몰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소비자가 좋아할 만한 스토리를 기획하며 상상을 펼치는 시간 동안 나는 "지침"이라는 걸 몰랐다. 출퇴근 왕복 세 시간 반을 자랑하는 그 긴 시간이 나에게는 오로지 조용하게 창문 밖의 사색을 즐기며 스토리를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집에 오고 샤워를 하면서도 스토리를 생각하는 내 모습은 내가 봐도 끈질겼다. 퇴근 후에도 업무 생각이라니, 주변 사람들의 말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렸다.

'그래도 재미있고 좋은 걸 어떡해!'

그렇게 반나절을 생각해서 들고 간 아이디어는 다행히 팀원의 반응이 좋았다. 깔깔거리며 의견을 나누는 우리 팀의 소리를 듣고 몰려든 다른 팀원들까지.

'좋아하는 일을 이래서 하는 거구나?' 생각이 들어 너무나 뿌듯하고 행복했다.


[EP04]

간과했던 일

2021.05.31


입사 한 달 반.


온몸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발악을 했다. 어릴 적부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면 장이 꼬이고 위가 꼬이는 등 이리 터리 몸에 탈이 많았던 터라, 무뎌질 만도 했지만 각각 다른 질병으로 반응하는 나약한 몸뚱이 때문에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방해하는 이명과 빈혈, 장꼬임 현상까지. 매일 다섯 시 반에 기상해 출근하는 생활이 조금씩 나의 열정도 갉아먹고 있었다.


뭐든 잘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일까? 서서히 적응해가던 업무에도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케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자사의 매출을 돕기 위해 소비자와 광고를 분석하여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콘텐츠와 광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효과적인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이 데이터와 숫자, 경우의 수를 도출해내는 분석력이 필요했다.


"숫자"와 "데이터"와 담을 쌓았던 내게는 다소 어렵게 직무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평소 나에게 숫자란 "죽어도 향상이 안 되는 영역"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데이터와 분석으로 굴러가다니. 즐거워하던 콘텐츠 스토리를 짜내는 일은 극히 일부에 관한 일이었다. 그마저도 데이터와 분석으로 짜이는 스토리였다. 점점 잦아드는 실수와 분석에 대한 부족함이 계속해서 내 눈에 띄었다. 잘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다짐할수록 내 노력을 묵살하듯 더 삐끗해졌다. 집에 가는 동안 자책하고 나의 실수와 노력을 탓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찰나에 개별 피드백 면담요청이 들어왔다. 왠지 모를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섰지만, 회의실을 나올 때엔 빗나가지 않은 예상으로 지구 끝까지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돌아보면 나약했던 짓일지 몰라도, 그땐 그랬다.


나의 정규직 전환 평가율이 50%라는 말. 나의 역량을 자책했던 그간의 날들이 비껴가지 않았던 자책이었음을 확인했던 한마디 었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을 수도, 나의 역량이 죽어도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잘하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마음 한편에 다짐으로 쌓아 올렸던 불안한 탑들이 허탈하게 무너졌다.


결코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기에 충분히 해낼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들이 머릿속의 생각들과 섞여 아득하게 들려왔다.

애써 차오르던 눈물을 참고 들키지 않으려 약간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잘 평가받은 나머지 50%는 어느 부분인가요...?"

담담한 표정으로 묻는 나의 내면에는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는 답변이 돌아올까 노심초사하는 불안함이 깃들여 있었다.

"스토리를 짜내고 멘션을 작성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다행히도 내가 재미를 붙였던 분야에 있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도 무언갈 해낼 수 있다는 약간의 위안과 내가 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피드백 후 화장실에서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왔는데도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참 많이도 울었다. 행여 사람들에게 훌쩍이는 소리가 날까 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죽여 눈물을 닦아냈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은 맑았다. 내 일상만 빼면 이토록 평화로운 풍경을 뒤로하고 버스는 열심히 달렸다. 참, 길고도 긴 하루였다.




[미루다]


나도 모르게 미뤄왔던 내 진심은 무얼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간극 사이에서 어쩌면,

"너하고 싶은 거 다해"라는

맘 편한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끊임없이 걱정하고 우려했던

자물쇠를 풀어주기 위한

자유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몰락]


꿈꿔왔던 것들이 몰락한다.

그토록 바라고 내 것이길 바랐던 것들은

어느새 고요만을 남겼다.


모든 것이 가라앉고 남은 침묵이

가엾게 서 있는 나를 구렁텅이로 밀어낸다.


이런 나의 모습,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슬픈 웃음 짓는 나를

나란 아이는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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