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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머 Dec 05. 2020

성적표를 찢었다

일렬로 줄 세워졌던 학창 시절을 돌아보며

 독립을 생각하다가 집값을 보고 현실을 자각한 후, 지금 가진 방이라도 잘 정리하며 살아보자 싶어서 방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청소의 시작은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는 거겠지요. 이제 학교는 다 졸업해버려서 공부라곤 한 글자도 안 하는데 책장에 꽂힌 건 왜 그리도 많을까요. 책장 가장 위칸부터 비우기 시작했습니다.


 공부하려고 샀던 일본어 기출문제집, 영어학원 다닐 때 썼던 교재들, 비어있는 클리어 파일들, 실습일지, 반도 못 채운 공책들 사이에서 성적표 뭉치를 발견했습니다.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닌데 성적표는 왜 그렇게 열심히 모아뒀을까요. 궁금해서 두툼한 L자 파일을 채운 성적표를 꺼냈습니다.

 종이를 가득 채운 과목명과 숫자들을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건 역시... '나 공부 진짜 못했구나'였습니다. 특히 수학 성적은 바닥을 자주 쳤더라고요(저는 지금도 숫자가 싫어요). 그래도 저는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좌절하거나, 너무 싫은 걸(수학 공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취직해서 먹고사는 걸 보면 다행히도 성적은 전부가 아니었나 봐요.


 성적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았습니다. 가장 최근이었던 대학 성적부터 수능, 각종 모의고사, 고등학교 내신, 중학교 내신 등등 수많은 성적표를 넘기다 질려버렸어요. 너무나도 많은 성적표를 보면서, 정말 지긋지긋하게 줄 세워졌었구나,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마치 남처럼 떠오를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그 순간 어린 제가 보였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 아이를 갑갑하고 끝없는 줄에 자꾸 구겨 넣으려고 하는 세상에 화가 났고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줄서기라면 그나마 이해해보겠는데, 겨우 시험성적이라니요. 겨우 등수놀이라니요.


 양이 너무 많아서 모든 성적표를 다 살펴보지도 못하고 그냥 벅벅 찢었습니다. 만약 올 1등급을 받은 수능 성적표였다면 찢을 수 있었을까요. 쉽게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10년 이상 제도권 안에서 성적으로 평가받으며 줄 세워진 경험이 너무 강렬합니다. 학교에서 벗어난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1등이 아니면 의미 없다'라고 생각하는 저를 보니 입이 쓰네요.


 성적표를 찢은 건 뭐 제도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행위예술은 아니고, 그냥 개인정보를 가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도 양손으로 시원하게 잡아 찢으면서 어떤 쾌감을 느꼈어요. 이제 내 인생에 성적표 없다!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된다! 그런 자유를 느꼈어요.


 물론 회사에서는 연말마다 저를 평가할 거고, 그 평가는 학창 시절의 시험 점수보다 살벌할 거예요. 당장 제 생계를 위협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제는 알아요. 세상의 평가 결과보다는, 제가 저 스스로에게 내리는 평가가 훨씬 중요하다는 걸 말이에요. 회사야 잘리면 그만이고, 또 다른 일자리를 찾으면 되지만 저는 저를 자를 수 없잖아요. 가끔 못난 나에게 9등급을 주고 싶더라도 잘 다독여가면서 무탈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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