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눈싸움보다는 눈으로 떡을 만들어서 떡가게 놀이를 즐기는 어린이였습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달콤한 맛이고요, 저기부터 저기까지는 매운맛이에요." 동네 친구들 중 손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애가 없어서 다 같이 가게의 주인 역할을 했어요. 주황색 가로등 불빛 아래 눈떡집에는 손님은 하나도 없었지만 눈의 냉기가 장갑 안을 파고들 때까지 눈을 뭉쳤던 기억이 납니다.
누구나 어릴 적 한 번쯤은 해봤을 천사 만들기도 참 좋아했습니다. 폭신한 눈에 눕는 게 왠지 일탈하는 것 같으면서도 시원하고, 추울 것 같은데 차가움보다는 포근함이 더 크게 느껴졌어요. 눈에 누워서 팔다리를 신나게 파닥거리고 일어나면 바닥에 천사가 가만히 누워있었어요.
눈썰매도 신나게 탔어요.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짜릿한 순간은 잠깐인데 다시 썰매를 끌고 올라가는 건 지루하고 오래 걸린다고 투정 부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요. 물론 내려오는 순간에는 '이렇게 신나려고 이 고생을 했구나!' 하며 씽씽 내려갔지만요.
눈에 대한 가장 강렬하고 행복했던 기억은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있어요. 학교 지원으로 일본에 어학연수를 한 달 갔었는데, 그때 방문지중 한 곳이 바로 시라카와고였어요. 눈이 정말 많이 내리는 지역이에요. 살면서 눈이 그렇게 많이 온 걸 본 적이 없어요. 조용한 산골마을에 눈이 쌓여서 적막하기까지 했는데 그때 '숨 막히게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실감했어요.
너무너무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도 시라카와고의 눈 속에서 친해졌어요. 아무도 밟지 않아 차곡차곡 쌓여가는 새하얀 눈을 함께 뽀득뽀득 밟으며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이야기를 한참 나눴어요. 눈과 풍경과 사람 모두 그림같이 아름답고 행복했었는데, 그 추억으로 저는 아직까지 버티고 있어요.
그때 아름다운 눈의 절정을 본 후로 눈은 제 인생에서 점점 하찮아집니다. 내릴 때는 설레지만 그 설렘보다는 녹으면서 더러워지고 길도 미끄러워져서 귀찮은 마음이 더 커졌어요. 눈길에 한 번 크게 넘어져서 너무 아파서 못 일어나고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했던 트라우마도 남았고요... 그때 이후로는 눈이나 비가 올 때 절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지 않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렸어요. 차를 산 이후 처음으로 맞는 눈이었는데요. 눈이 오니까 예쁘긴 한데, 차에 눈 쌓여서 얼면 어쩌나, 시동 안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 더 크더라고요. 우리 아이 눈길에 넘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부모님 마음이 이런 걸까요.
또 차가 힘이 약해서 미끄러운 오르막길을 잘 못 오르는데, 미끄러지면 어쩌나, 뒤로 밀리면 어쩌나 싶어 엄청 무서웠어요. 빗길에 차가 전진을 못하고 계속 뒤로 미끄러져서 보험사를 불렀던 적이 있거든요. 눈길은 더 미끄러울 텐데, 걱정이 앞섰어요(다행히 이번에는 운전할 일이 없어서 괜찮았습니다!).
걱정은 걱정이고 눈은 눈이니까, 눈 오면 빠질 수 없는 코스인 눈사람 만들기는 빼먹지 않았어요.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하나둘씩 올라오는 눈사람 사진을 보니 사람 다 똑같아서 귀여워서 많이 웃었고요.
눈은 변함없이 겨울마다 내리는데, 저는 겨울마다 조금씩 바뀌어가요. 눈이 즐거웠다가, 귀찮았다가, 무서웠다가 해요. 끊임없이 변하는 나를 감싼 것들 중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매 겨울마다 빼먹지 않고 내리는 눈이 그렇고, 눈 속에서 친해진 친구와의 우정이 그래요.
참! 눈이 오면 못 참고 꼭 눈사람을 만드는 것도 변함없네요. 사는 모습이 변하고 중요한 가치가 변해도 언제까지나 눈이 오면 쪼그려 앉아 눈사람 만드는 어른으로 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