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 뒤에 숨은 한국 직장인의 진짜 심리
매장에서 말씀을 나누던 분들 중, 한 분이 “그 친구는 짤라도 괜찮아. 그 사람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 매출이 몇 천억이라는데, 뭐가 걱정이야.”라고 동행분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회사의 구조조정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곱씹어 보니 그건 단순한 인사 조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같이 일을 계속할까, 말까’ 하는 고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던 것 같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
이런 말이 나오는 상황에는 공통된 배경이 있다.
그 친구가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공감이 안 될 때다. 말투 하나, 태도 하나에서 미묘하게 거리감이 느껴지고, 같이 있어도 ‘같이 일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능력이 아닌 감정으로 판단을 시작한다.
그 친구가 정말 ‘정이 가는 사람’, 같이 일하면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었다면 ‘짤라도 괜찮다’는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그 말은 “함께하기 어렵다”는 감정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의 ‘정’이라는 잣대
한국 직장 문화의 특징은, 일을 잘하느냐보다 ‘사람이 괜찮으냐’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우린 능력을 평가할 때조차도 정서적 호감을 필터로 씌운다. 정이 가는 사람에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정이 안 가는 사람은 실적이 좋아도 ‘왠지 불편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평가는 늘 이 두 가지가 뒤섞인다. 이성과 감정, 성과와 인간관계.
정으로만 판단할 때 생기는 왜곡
정으로 판단하면, 사람은 따뜻해지지만 조직은 흔들린다. 진짜 유능한 사람이 소외되고, 말 잘하고 분위기 맞추는 사람이 남는다. 하지만 반대로 능력만 보려 하면 공동체는 차가워지고, 관계가 부서진다. 문제는 균형이다. 정으로 사람을 품되, 판단의 순간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결국, ‘정서적 공감’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니까 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정이 공감의 형태로 작동할 때
조직은 건강해진다. 공감이 있으면 서로의 실수를 이해하고, 기준이 있으면 서로의 한계를 존중할 수 있다.
“그 친구는 짤라도 괜찮아”라는 말이 진짜로 의미하는 건, 어쩌면 이거다.
'함께 가도 괜찮을까?'
'내 마음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우린 오늘도 능력과 정 사이에서 흔들리며, 결국 ‘공감’이라는 이름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베트남에서 '사람 짜른다'는 말을 참 많이 들은 것 같다. 어찌보면 나도 직원의 태도만 보고 능력여부를 편가해 보기도 전에 그를 포기하진 않았나 반성이 된다. 물론 태도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신입들에겐 더 중요한 능력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