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사라져도 언어와 태도는 남는다
윤석열 내란 우두머리의 법정 장면을 보다 보니, 처음엔 분노보다 이상함이 먼저 들었다. 저 사람은 법정에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은 다 한다. '기억이 안 난다' '지시한 적 없다' '책임은 밑에서 생긴 일이다' 그러면서 거짓말도 입에 침도 안 묻히고 한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형적인 권력자의 언어다.
그런데 더 이상했던 건 그 다음이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다. 피의자 신분으로 함께 재판을 받고 있는 수하들이야 그렇다 해도, 홍장원을 비롯한 다른 증인들 모두가 그 앞에서 여전히 고개를 낮추고 존댓말을 쓰면서 마치 조선시대 폭군앞에 무릎꿇은 신하들 같은 저자세를 하고 있는 듯 하다.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아...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같은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억울해서라도 한 번쯤은 감정이 터질 법한데.’
그런데 아무도 그러지 않는다. 모두가 지나치게 차분하고,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다. 마치 아직도 그가 ‘윗사람’인 것처럼. 이건 단순히 예의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된 이유들에 대해 찾아보았다.
1. 존댓말은 감정이 아니라 조건반사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저 사람을 만난 게 아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조직 안에서 상명하복 구조로 살아왔다. 보고할 때는 항상 높임말, 질문은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고, 표정과 말투까지 평가 대상이던 세계였다.
그런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상대가 피의자가 되어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머리는 '저 사람은 기소됐다'라고 알고 있지만, 몸은 여전히 '위에 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건 비겁함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2. 법정은 분노를 터뜨리는 장소가 아니다
법정은 감정의 무대가 아니다. 특히 공직자 출신에게 법정은 더 그렇다. 말 한마디, 어조 하나가 모두 기록으로 남는다. 조금만 감정이 섞여도 '신빙성 부족'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정을 억누른다. 존댓말은 그중 가장 안전한 언어다. 날카롭지도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개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
3. 이것은 예의가 아니라 거리두기다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존중하거나 용서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반말은 감정을 섞는 행위다. 욕설은 개인적 충돌이다. 존댓말은 관계를 제도 안에 묶어두는 언어다.
'당신은 내 감정의 대상이 아니다. 법적으로만 다뤄질 객체다.'
차가운 존댓말은 가장 냉정한 선 긋기다.
4. 권력은 끝나도 그림자는 남는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판결도 확정되지 않았다. 정치적 파장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이 상황에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건, 정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위험한 선택이 된다.
한국 사회는 특히 그렇다. 조금만 튀어도 “선 넘었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조심한다. 이 장면들을 보며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다.
'권력은 사라져도, 권력에 길들여진 태도는 오래 남는다.'
그들이 마주한 건 한 사람의 피의자가 아니다. 과거의 상관, 조직, 서열, 평가 시스템이다. 그래서 목소리가 낮아지고 말이 조심스러워지고 존댓말이 먼저 나온다.
불편함을 느낀 나에 대한 생각
이런 장면들을 보며 내가 느낀 불편함은 그들을 향한 비난이라기보다, 나 자신에 대한 확인에 가까웠다. 나는 아직 저 언어에 완전히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불편했고, 그래서 이상했고, 그래서 화가 났다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권력 앞에서 침착한 사람보다는, 부당함 앞에서 감정이 먼저 움직이는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건 이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태도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살아온 방식과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법정 속 그 존댓말들이 유난히 낯설게 들렸던 이유는, 아마 내가 아직 권력의 언어보다는 생활인의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불편함을 잃지 않고 사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얼마전 홍장원 전 차장이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에게 한 말이 유난히 오래 남는다.
"피고인, 지금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시는 건 아니죠?"
법정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판결은 평등하고 공명정대하게 내려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