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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호 Jun 07. 2024

한국과 호치민의 인연

독립운동가로서의 한국과의 인연

 베트남을 생각하면 쌀국수와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성이 떠오를 것이다. 베트남에 관심이 있거나 호찌민시를 방문하게 되면 호찌민이 누군지에 대해 궁금할 것이다. '베트남사회주의'하면 호찌민이 떠오를 것이고, 통일전쟁 당시 참전한 한국군에 대해 호찌민이 한 얘기에 대해서도 들어 본 바가 있을 것이다.  


 노획된 베트콩 문서에 의하면 베트콩은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도록 지시가 되어 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이니 비무장한 한국 군인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말라. 

[뉴욕 타임스 1966년 7월 22일 자]  이 지시가 호찌민이 직접 한 것인지, 공산당의 지시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지시했다는 말이 있다.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앞 호찌민 동상

 1990년대 주한베트남 대사를 지낸 응우엔 푸 빈 대사의 인터뷰를 통해 호찌민 지도자가 ‘다른 민족을 경시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랍게도 호찌민이 한국과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우선, 그는 다산 정 약용 선생을 좋아했고, 목민심서를 읽으면서 인민을 위한 정치를 구상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몇 개 되지 않는 마지막 유품 중에 목민심서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과도 교류하였다고 한다. 양국 모두 식민국가의 처지에 있었고,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파리에서 열린 평화협정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투사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다. 당시 신한청년단의 김 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직을 수행하며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로 참석하였다. 이때 호찌민을 만나 친분을 쌓았고 서로 집에 초대하여 만날 정도로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1945년 한국이 해방이 된 직후, 호찌민은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하이로 찾아와 환송연을 열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의 부주석이 김 규식이었다.

 프랑스의 자료에 따르면, '호찌민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계획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라고 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위한 계획수립에 한국 독립운동가의 전략과 전술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약소민족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베트남의 호찌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과 버마의 전선에서 일본제국군과 맞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는 한국 독립군과 베트남 독립군이 버마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독립 투쟁을 한 것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명확한 확인 근거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1942년 8월 호찌민(Ho Chi Minh)이라는 개명한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다가 중국 국경에서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잡혀 1년 간 투옥되기도 했다. 1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며 그는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1943년 9월 감옥에서 석방된 호찌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기지를 건설하고, 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끝나가던 1944년 12월 보응우옌지압의 지휘하에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해외생활 도중 미국과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미국의 OSS는 호찌민이 말라리아로 쓰러지자 키니네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앞서 장제스가 체포한 호찌민을 OSS가 구해주기도 했다. 1944년 11월에는 미군 전투기가 베트남 상공에서 떨어져 공군조종사 한 명을 살려줌으로써 미국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또한 종전 직전인 1945년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은 호찌민의 주선으로 OSS에 들어가 여러 훈련을 받기도 했다.   [ 나무위크 '호찌민' 검색 재인용 ]  


 냅코 프로젝트는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전략첩보국)이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걸쳐 한인 공작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미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한반도침투작전이다. OSS는 재미 한인 중 민간인과 군인, 미국 내 포로수용소 출신의 한인 포로, 버마에서 탈출한 학병출신 한인 등을 모집해 ‘냅코프로젝트(Napko Project)’란 이름의 한반도침투작전을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한반도는 물론 일본 본토까지 교란시켜 미일 전의 승리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OSS는 1942년 1월 중국을 우회한 한반도 침투계획(올리비아계획 : Scheme ‘Olivia’)에서 출발해 1942∼1944년 COI의 특수부대인 101 지대의 활동 경험 등을 통해 1944년 중반부터 대일전 승리를 위한 방안을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중국 전구를 토대로 한국인들을 이용한 한국·만주·일본 본토에 대한 침투계획을 수립했다... 독수리작전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를 중심으로 한미 연합에 의해 무전훈련, 유격훈련, 폭파훈련 등의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훈련의 목표는 한반도로 침투해 통신망을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일본 본토로 진입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냅코 프로젝트' 발췌 재인용 ] 


 호찌민은 '베트남의 독립'이라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을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민족주의자이며, 독립운동가였으며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라는 명칭의 우선순위보다는 민족과 인민을 사랑한 '애국자'라는 점에 방점을 찍는 것이 옳을 듯하다. 


 홍범도 장군의 이력을 가지고 공산주의자이니 민족주의자이니 왈가왈부하는 모습이 부끄럽기만 하다. 나라의 독립을 원했고, 인민을 사랑했다면 애국자로 판단을 끝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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