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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호 Jul 06. 2024

중국,한국,베트남의 과거제

중앙집권 체제구축의 공신 : 과거제

중앙집권 체제구축의 공신 : 과거제

 한국인들에게 동양의 국가들을 대표하는 나라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국, 한국, 일본을 이야기할 것이다. '동양'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중국을 필두로 한, 유교와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나라들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1994년 학생 때의 일이다. 중국어를 연습해 본다는 목적으로 홀로 아시아 6개국을 배낭여행 했을 때였다. 대만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그날 저녁에 미국 월드컵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날 한국의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한국은 아쉽게도 패배를 하였다. 그 경기를 같이 보던 외국인들이 내게 위로의 말이라고 해 준 말에 놀라고 당황했었다. "아쉽지만 아시아 국가 사우디가 남아 있으니 아시아인으로서 너무 실망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아시아 국가였어?' 그 당시만 해도 난 아시아라고 하면 한중일 그리고 동남아의 국가들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동양 국가라는 단어에서 '중국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런데 그 좁은 편견 속에서 또 하나의 오류를 갖고 있는 듯하다. 사실 중국에 기반을 둔 불교와 유교, 그리고 중앙집권체계를 갖추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베트남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본 정계에서는 일본은 동양이 아닌 서구라고 자처할 정도로 동양의 것을 스스로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전형적인 '동양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들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적어도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는 '동양'이라는 관념 속에서 보자면). 


  그 하나의 예가 과거제도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수나라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는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에 도입되었고, 베트남에선 Ly 왕조 때 도입되어 20세기초까지 운용되었다. 일본은 일시적으로 과거제를 시행하기는 하였지만 지속되지 못하였다. 

 일본은 헤이안시대에 잠시 과거제를 운용하였지만, 과거제로 등용된 인재도 하급관리나 지방관리에 기용되는 한계를 갖고 있었고 그것마저 헤이안 시대 말기에 율령제가 반포되면서 폐지되었다. 일본은 관직을 세습하는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는 '동양 국가'라는 이미지를 갖게 만드는 중국, 한국, 베트남의 과거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군주가 절대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졌다는 것,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유지되었다는 것 등은 모두 서양의 역사에서는 17 세기 절대주의 시대에나 볼 수 있는 국가 체제의 특징이다. 이렇게 동양의 국가가 완벽한 체제를 갖추는 데 일등공신은 단연 과거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과거제도

 과거가 처음 시행된 것은 587년 수(隋 : 581~618)에서의 일이다. 위진남북조의 오랜 분열을 종식시킨 수 왕조는 관료제를 정비한 후 관료를 충원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호족이나 문벌귀족들은 황제가 아닌 가문과 지역 사회를 발판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천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이에 민인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를 뽑아 천자의 천하 통치를 분담시키고자 과거제가 도입되었다. 

 과거는 지방 관아의 고급 관원을 모두 중앙에서 임명, 파견하여 세습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고 문벌귀족을 견제할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당시 과거는 ‘과목선거(科目選擧)’라는 용어로 쓰였으며, 문제 때 수재(秀才), 명경(明經), 진사(進士) 등의 과목이 만들어졌다.

 수의 과거제는 당으로 계승되었는데, 당의 과거는 일종의 관원후보 자격시험(禮部에서 주관하는 예부시)으로, 관리로 임명되기 위해서는 이부시(吏部試)에 다시 합격해야만 했다. 이부시는 인사권이 황제가 아닌 귀족에게 있었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선발 기주이었기 때문에 가문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과목에는 수재과, 명경과, 진사과 등이 있었는데, 경전 시험인 명경과와 시문 시험인 진사과가 가장 성행하였다.

 송대에는 전시(殿試) 제도를 통해 황제가 과거합격자를 최종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한 점이 특징이다. 전시제는 과거 합격자와 시험관 사이에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붕당이 생기는 것을 막고 황제를 향한 충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자는 과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관리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고, 과거의 합격이 천자에 의해 결정되므로 합격자는 황제의 충실한 문생(門生)으로서 천자의 질문에 대한 대책(對策), 곧 상표문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 동아시아의 역사 : 제3장 생산력의 발전과 지배층의 교체, 동북아 역사넷 정리 인용 ]


 한국의 과거제도

 우리나라에 과거제가 도입된 것은 958년(광종 9)으로, 고려의 광종이 군주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처음 과거제를 실시하였다. 과거제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천여 년 동안 대표적인 관리 선발 방식으로 기능해 왔다. 왕조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시행 절차와 내역에서 변화가 있었지만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한다는 측면에서는 성격이 다르지 않았다.


 과거제가 고려에 도입되어 처음 시행된 것은 958년(광종 9)이다. 918년 고려가 건국된 이후 후삼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 태조 왕건은 포용 정책과 혼인 정책을 통해 정치적으로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였다. 936년 후삼국 통일 이후 정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서 왕권의 강화와 더불어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유교적인 교양을 갖추고 왕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문신 관료가 그들이었다. 이에 광종은 중국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에 따라서 과거제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고려의 과거제는 교육기관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갔다. 성종 대에는 개경에 국자감을 설치하였으며, 지방에는 경학박사를 파견하여 교육시켰다. 교육과 과거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은 물론 지방의 자제들까지 관료화시킬 수 있었다. 


 이후 조선왕조를 건국한 사대부들은 고려 말부터 추진해 온 과거제도의 개혁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고려시대의 제술과와 명경과를 통합하여 문과로 하였으며, 다음 해 무과를 실시하였다. 문과와 무과 양과가 균형적으로 운영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양반(兩班) 관료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집권 사대부들은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성균관 · 사부학당 · 향교 등의 관학을 진흥시키고, 이들 관학과 과거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사부학당과 향교에서 양성한 인재를 선발하여 성균관에 입학시켜 실력을 더 연마하도록 한 것이다.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변화의 물길이 일기 시작하였다. 문호 개방과 더불어 새로운 문물과 지식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었다. 변화 속에서 모든 것이 다 달라져야 하였으며, 관리등용 시험으로서의 과거 역시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파 관료들에게 과거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오랜 기간 동안 인재 충원 통로로 기능하던 과거를 폐지하게 된다. 새 시대에 알맞은 지식과 교양을 가진 인재와 그들을 선발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에서는 「 선거조례(選擧條例)」와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를 마련해서 시행하게 되었다. 선거란 인재 선발을 의미하며, 전고국은 의정부 산하에서 관리의 임용과 승진을 담당하던 관서를 말한다. 새로운 관리 등용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참조 정리 인용 ]



 베트남의 과거제도 

 유학(儒學)이 베트남 역사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때는 리(Ly) 왕조 시대였다. 천년의 수도 하노이 시대를 연 리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장기(長期) 왕조이다. 리왕조는 1075년 송의 제도를 받아들여 최초로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공자(孔子)와 유학의 성현(聖賢)들을 제사하는 문묘(文廟)와 국립대학인 국자감이 설치되어 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후 베트남의 과거제도는 1919년까지 유지되었다. 

 리 왕조의 과거는 미숙한 수준이었고 선발 인원도 많지 않았지만 제도적으로 왕권의 강화에 기여하였다. 

  베트남도 중국이나 한국처럼 문(文)이 무(武)를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오늘날 베트남의 교육열이 높은 것도 여기에 뿌리가 있다. 유교는 기존 베트남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 즉 사대부(士大夫)가 중심이 된 사인사회(士人社會)를 출현시켰다. [ 처음 읽는 베트남사 월간조선 2016년 4월호 , 동아시아의 역사 : 제3장 생산력의 발전과 지배층의 교체, 동북아 역사넷 참조 인용 정리 ]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작은 의미로 인식하고 있는 '동양국가'를 이야기할 때, 이제는 '한중일'이 아닌 '한중베'를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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