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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호 Sep 24. 2024

조선과 베트남의 노비제도 비교

평등 개념의 뿌리

 베트남에서 생활하며 남녀노소 모두가 상호 평등하게 대하는 듯한 모습을 종종 목격했다. 사장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거나, 여성들이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모습은 한국 사람으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베트남이 유교권 국가라는 사실과 가족을 중시하고 장유유서의 개념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러한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처음엔 '사회주의 국가라서 평등사상이 고취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조선시대와 베트남의 노비(천민) 계급에 대한 인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차이가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들 간의 평등 개념에 대한 뿌리 깊은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조선과 베트남은 모두 봉건 사회 속에서 신분 제도를 기반으로 운영되었지만, 두 나라의 노비 제도는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각 나라의 노예 제도는 사회 구조와 통치 방식에 따라 그 성격이 달랐고, 이것이 현대에 이르러 사회적 평등 개념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의 노비 제도

 조선시대 노비는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으로, 대개 세습되었다. 노비는 양반이나 지주의 재산으로 간주되었으며, 부모 중 한 명이 노비이면 자식도 자동으로 노비가 되어 대대로 신분이 이어졌다. 이는 지배 계층이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하고, 신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

 노비가 되는 경로는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세습 노비는 부모의 신분을 이어받아 자연스럽게 노비가 되었고, 조선 사회에서 가장 흔한 노비의 형태였다. 둘째, 전쟁 포로로서 노비가 되는 경우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적군이나 반란 세력이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조선은 대외 전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비교적 드물었다. 셋째, 범죄자가 법적 처벌로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양인이 범죄를 저지르면 노비로 전락할 수 있었고, 특히 반역죄와 같은 중범죄를 저지르면 가족까지 함께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넷째, 채무 불이행으로 인해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노비로 팔거나 자식들이 노비가 되어 채무를 갚아야 했다. 다섯째,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자발적으로 노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조선의 노비 제도는 점차 변화했지만, 갑오개혁(1894년) 때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사회의 중요한 계층 구조로 기능했다.


 베트남의 노예 제도

 베트남에서도 일종의 노예 제도가 존재했지만, 조선과는 몇 가지 큰 차이점이 있었다. 베트남의 노예는 주로 전쟁 포로, 채무 불이행자, 범죄자들이었으며, 그들의 신분은 세습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베트남의 노예는 왕실이나 귀족 가문에서 주로 노동을 제공했으며, 농업, 건축, 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베트남의 노예 제도는 조선과 달리 유연한 구조를 가졌다. 전쟁 포로나 채무 불이행자가 노예가 되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자유를 얻거나 주인의 자비로 해방될 수 있었다. 노예와 주인 사이의 신뢰 관계에 따라 더 나은 대우를 받거나 자유를 얻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세습적 성격이 강한 조선과 달리, 베트남에서는 노예가 세습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차이점은 베트남의 사회적 유연성과 관련이 깊으며, 조선에 비해 노예 계층이 차지하는 비율도 훨씬 적었다.


 유교 사상과 노비 제도

 유교 사상은 노비 제도를 직접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위계질서를 강조함으로써 노비 제도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유교는 각 개인이 자신의 신분에 맞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계층 간의 불평등을 용인하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와 충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로 연결되었고, 이를 통해 상하 계층 간의 차별이 자연스럽게 유지되었다. 이는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반면 베트남은 같은 유교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엄격한 신분제를 유지했다. 이는 전쟁이 많았던 역사적 배경과 베트남 사회의 유연한 경제 구조가 결합된 결과였다.


 역사적 인식과 현대 사회의 차이

 조선과 베트남의 노비 제도는 역사적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조선은 세습적이고 광범위하게 노비 제도를 운영했으며, 이를 통해 신분 질서를 고착화했다. 반면 베트남은 노예가 일정 기간 후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세습적 성격이 약한 구조였다.

 이러한 역사적 차이는 오늘날 두 나라의 평등 개념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에서는 개인 간의 관계가 비교적 평등하게 유지되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남아 있는 신분제적 사고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내가 베트남에서 경험한 평등한 사회적 분위기, 사장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거나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과거의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차별과 불평등의 잔재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성찰하고,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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