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포개발과 번역 알바, 두 세대의 직장 이야기
오늘 재현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알바 짤릴지도 모르겠어요" 재현이는 지금 한 대형회사에서 영문글 작성과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글을 쓰고 올리는 속도가 느리다고 자꾸 독촉을 받는 모양이다.
딸의 말로는 단순한 번역 이상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한다. 그냥 기계적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원문도 여러 번 읽고 작가의 생각과 흐름을 파악해서 자연스럽게 영어로 옮기려고 한단다. 나름대로 글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책임감도 있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회사 입장에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닌 듯하다. 그저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양을 올리는 게 우선인 것 같다. 마치 GPT한테 맡겨서 쭉쭉 뽑아내는 식으로 하라고 요구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내가 베트남에서 직장생활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당시에 나는 백화점 점포개발을 책임지고 있었다.
하노이와 호찌민에 하나씩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베트남의 경제규모나 소비 트렌드를 감안하면 더 늘리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회사는 아니었다. 점포 개발을 닥달했다. 하이퐁, 다낭, 붕따우 까지. 심지어 베트남 사업부문장은 다랏과 껀터에도 백화점을 낼 수 있는 부지를 찾아보라 하셨고, 인민위원회 위원장과의 면담을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회사는 성과를 내놓으라고 압박했고, 나는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걸 설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과는 기대하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
지금, 하노이에는 65층의 '롯데센터 하노이'가 번듯하게 서있고, 호찌민시에도 '다이아몬드-롯데 백화점'이 당당하게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두 곳 외엔 신규로 개점한 백화점이 없지 않은가!
그때 내 판단이 전혀 틀리진 않았다고 느끼지만 조직과 직장생활은 또 다른 것이다. 내 생각과 조직의 목표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재현이에게 이야기해줬다.
회사는 회사 나름대로의 목표와 기준이 있고, 그걸 구성원에게 요구할 권리도 있다. 그것이 억지로 느껴지더라도 직장생활이란 결국 일정 부분 그 틀 안에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 틀이 자신과 너무 맞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관두는 것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결정이지, 회사가 자기를 '잘라낸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재현이에게도, 나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너무 "내가 틀렸다" "회사가 나쁘다"는 식으로 양극단에서 스트레스를 받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직장은 늘 불편한 곳이기도 하지만, 때론 나를 더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해주는 거울이 되기도 하니까.
대학 졸업후 사회에 나와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재현이도 점점 조직생활이란 게 얼마나 복잡하고 때로는 부조리한지를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뭔가를 제대로 해보려고 애쓰는 마음이 고맙고 기특하다.
회사라는 곳은 늘 자신만의 속도가 있고, 논리가 있다. 그게 꼭 옳다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그 안에 몸을 맞춰가야만 하는 현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재현이 같은 사람이 가진 섬세함과 성실함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태도가야말로 앞으로 더 멀리 가는 밑거름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저 하나 바라는 건, 우리 재현이가 너무 남과 사회에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조금은 서툴러도, 조금은 늦어도 괜찮아. 세상이 원하는 속도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할 때가 분명히 있어. 그걸 잊지 않으면, 결국엔 잘 갈 수 있을거야.
"아빠가 우리 재현이 제일 사랑하는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