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질문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입사 면접은 늘 예상 밖에서 시작된다. 그날도 그랬다. 형식적인 몇 가지 질문이 오갔고, 나는 그럭저럭 무난히 대답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력서를 훑던 면접관 한 분이 살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학교 다니면서 데모 많이 했었나 봐요. 성적이 안 좋은 걸 보니…”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가볍게 던진 농담 같기도 했지만, 그 속에 담긴 뉘앙스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질문엔 시험, 판단, 혹은 호기심 같은 것들이 얽혀 있었다. 무엇이 최선의 대답일까. 속으로는 계산이 오갔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른 건 대학 시절의 내 모습이었다.
나는 군 조종사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하늘을 나는 사람이었고, 우리 가족은 늘 땅을 딛고 조심조심 살아야 했다. 나중에 어머님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민간 항공사 기장이 된 당시에도 조종사 가족에게는 최소 일 년에 한 번씩 신원조회가 나왔다고 한다.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 이상한 단체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은지, 부부 관계나 가정 생활에 문제는 없는지, 불순 세력은 없는지(?) 등을 확인하는 절차였다고 한다. 언제든 북으로 비행기를 몰고 갈 수 있는 위치니까!
그만큼 내 삶도 ‘조심’이 항상 따라 다녔다. 운동에 참여한 것도 실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절대 붙잡혀서는 안 됐고, 어디서든 나서서도 안 됐다. 광주 묘역을 참배하는 것도 하지 못했고, 사수대도 참여해보지 못했고, 오버하는 행동은 금물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는 정말 세상이 그렇게 ‘이쁜’ 줄만 알았다. 대입 재수를 시작했을 때, 낮 시간 버스와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걸 보고, '이 시간이면 아빠들은 직장에, 엄마들은 집에, 학생들은 학교에 있어야 할 텐데… 이 사람들은 뭐지?' 하고 진심으로 의아해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면접장에서 그렇게 말했다.
“네, 사실 운동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에 오기 전까지는 세상이 옳고 아름답기만 하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서, 세상엔 생각보다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운동이라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데 적어도 힘이 될 것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경험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을 마치고 면접관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누그러졌던 걸,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 면접관—당시 회사 대표이사—역시 군 장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도, 군 조종사였고. 그 사실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다만 그날, 나는 ‘정직한 대답’을 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 면접을 통과했고, 회사에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아이들의 부모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 시절의 내 머뭇거림, 그 안에 있던 불안과 용기, 그 모순된 감정들.
그리고 바란다. 우리 딸아이와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세상이 정해준 답만을 따라가지 않기를. 때로는 직접 질문하고,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훈련을 시작하길 바란다.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어찌 보면,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게 지켜낸 민주주의는 어디로 갔을까?" 오히려 지금 우리 세대가 더 황당한 모습으로, 정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절 잘못된 세상을 발견하고 고민하고, 변화에 조심스럽게나마 동참했던 내 마음과 작은 행동은 지금도 내 안에서 가장 단단한 기둥처럼 자리 잡고 있다.
우리 딸 아들이,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단정할 수 없더라도, 세상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고민하고 평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가끔 딸아이가 어떤 일에 대해 “아빠는 어떤 의견이세요?” 하고 물어올 때가 있다.
괜히 뿌듯하고, 기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