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 조선시대 유생들 삶의 모델

유생들의 삶이 전하는 성찰과 협력의 메시지

by 한정호

부모님의 살고 계시는 인천을 오가면서 '부평 향교' 안내 도로표지판을 볼 때 마다 '가봐야지...'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 아침 마침 오전 짜투리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다가 바로 차에 올라타 네비에 '부평향교'를 찍고 시동을 걸었다.

10여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 '마음만 먹었으면 바로 왔었을 것을' 이라는 생각에 단독주택들 주변에 주차를 하고 향교가 있다는 방향으로 걸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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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4_104243.jpg 부평 향교 정면 및 소개 안내판 설명문

단독 주택과 교회 건물, 높은 현대식 건물들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수풀이 무성하면서도 고요가 느껴지는 '작은 웅장함'이 엄습함을 느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 근교에서 이토록 고즈넉한 유교 공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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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4_105938.jpg 현대 건물 숲속에 고전을 간직하고 있는 부평향교의 고즈넉한 모습


향교는 조선 초 태조 때 설치된 이후, 성종 때 전국에 360여 곳이 세워졌다. 중앙의 성균관 아래 지방에서 유교 교육과 제례를 맡는 관학이었다. 공자를 비롯해 송·명 유학자들을 제사하고, 지역 유생에게 『사서오경』과 『소학』 같은 경전을 가르쳤다. 국가가 운영비를 대는 만큼, 향교는 지방민에게 유교 이념을 전파하는 핵심 기지였다고 볼 수 있다.


부평향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된 기록이 남아 있다. 주변 관아와 연결된 길목, 제향 공간인 대성전과 강의 공간인 명륜당, 그리고 유생들이 지내던 동재·서재가 남아 있다.

향교에는 동재와 서재, 두 개의 기숙사가 있었다. 내사생으로 선발된 유생들은 춘기·추기 학기 동안 이 방에 머물며 공부했다. 한 계절(봄·가을)마다 2~3개월씩 기숙했고,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은 수년간 거재를 이어가기도 했다. 동재엔 양반 자제, 서재엔 서민 유생이 머물렀다고 한다.

20250524_104829.jpg 명륜당 전경

명륜당은 향교에서 강의와 토론이 이뤄지는 ‘강의실 겸 집회 공간’이었다. 대성전(大成殿) 정면 앞에 자리하고, ‘밝을 명(明)’, ‘인륜 윤(倫)’을 써서 ‘인륜을 밝힌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이곳에서 유생들은 경전을 낭독·암기하고, 훈장님 앞에서 주제별 토론(論難)을 하던 강의실 역할을 했다. 또한 제향 전후에 유림 회합을 여는 집회 공간으로도 쓰였다. 통상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의 목조 건물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었다. 처마가 비교적 짧고 단정한 맞배지붕 형태가 많아, 소박하면서도 교육 공간으로서 격식을 유지했다.

모든 유생이 명륜당을 중심으로 모여 공부하는 모습이 곧 향교 교육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겟다.

20250524_104849.jpg 동재 전경
20250524_104812.jpg 서재 전경
20250524_104859.jpg 동재와 서재 앞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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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서재는 유생들의 학습공간이자 기숙 공간이다. 대성전과 명륜당 오른쪽, 동쪽에 있는 ‘齋(재실)’ 건물이라 동재(東齋) , 그 반대로 왼쪽, 서쪽에 자리한 기숙사를 서재(西齋)라 하였다.

두 곳 모두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하고 식사·취침하던 거재(居齋) 공간인데, 일반적으로 동재엔 양반 자제급 상급생, 서재엔 서얼·평민 출신 하급생을 구분하여 배치되어 생활하였다.

20250524_104803.jpg 동재 / 서재 설명문

정면 5칸, 측면 1.5칸 정도의 비교적 작은 목조 온돌집이다.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어, 방마다 4~6명이 함께 생활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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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4_105831.jpg 동재/서재 주변 전경

당시 유생들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새벽 북소리와 함께 기상해 명륜당 대문 앞에 모여 입정례을 갖추고, 오전에 논어, 맹자를 읽고, 교수인 훈장 앞에서 논난(論難)을 주고받았다. 점심 뒤 방으로 돌아가 암기와 필기를 반복하는 자율학습을 진행한다. 해질 무렵 하루를 돌아보며 의례를 지내고, 다시 방에서 밤늦도록 공부했다. 이 반복된 일과 속에서 유생들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동료와 경쟁하며 지식의 깊이를 더했을 것이다.

좁은 방에서 함께 공부하다 보면, 경쟁과 협력이 자연스레 공존했을 것 같다. 오늘날 스터디 모임과 비슷하면서도 더 엄격한 규율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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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4_105541.jpg 동무/서무 전경

동무(東廡)·서무(西廡)는 향교 대성전 양쪽에 딸린 날개채(wing building) 공간이다.

廡(무)는 ‘처마 끝이 길게 뻗은 날개채’를 뜻하며, 대성전 정면을 향했을 때 오른쪽 날개채가 동무, 왼쪽이 서무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 반 정도의 소규모 목조건물로, 대청마루 없이 온돌방 형태거나, 대청과 온돌을 섞어 쓰기도 했다.

이 곳은 제향용 악기(磬·편, 편경 등)와 제기(祭器)를 보관·준비하는 창고 역할을 했고, 제례 전후에 제관(祭官)들이 대기하거나 휴식하는 공간으로도 이용됐다. 때로는 유생들이 명륜당 수업 전·후 잠시 모여 경전을 토론하거나, 서적·문서를 보관하는 보조 강의실 역할도 하기도 하였다.

이 廡(무)는 제향의 ‘준비 공간’으로서, 향교 제사의 완결성을 뒷받침하고 있는데, 본전(大成殿)과 명륜당 사이에 배치돼, 교육(강의)과 제례(제사)가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매개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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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4_105629.jpg 돔무/서무 내부 전경 사진

대성전(大成殿)이란, 향교에서 공자와 그 외 성현(聖賢)을 모시는 ‘본전(本殿)’이다.

향교 경내의 정면 중앙에 위치하며, 향교의 맨 안쪽에 자리한다. 즉, 정문 → 전사청(典祀廳) → 대성전 순으로 이어지는 일직선 상에 놓여, 가장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보통 정면 3~5칸, 측면 2칸 내외 크기로 지붕은 단정한 맞배지붕 또는 팔작지붕 형태로, 처마가 넓게 퍼져 고즈넉한 인상을 준다. 앞쪽에는 넓은 대청마루가, 뒤쪽엔 방(온돌)이 있어 제례 준비나 휴식을 위해 사용되었다. ‘大成殿’ 현판을 걸고, 내부에는 공자·증자·자사 등 3현(三賢)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20250524_105409.jpg 대성전 전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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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4_105453.jpg 대성전 측면, 후면 전경

대성전에서 봄, 가을에 2회에 걸쳐, 공자와 성현을 위한 향사(香祀)를 지냈으며, 이 곳은 향교의 정신적, 이념적 중심이 되었다. 이 곳에서 유생과 지역 유림이 모여 학문과 예(禮)의 뿌리를 확인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이 곳은 명륜당의 교육 기능과 동·서무 등 제례 준비 공간을 연결해, 교육과 제사의 흐름을 하나로 잇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학문의 근원인 공자를 기리는 곳이니만큼, 여기서 비롯된 가르침이 명륜당·동재·서재로 퍼져 나간다고 의미를 갖는다. 한편, 제례 때 지역 유림이 참여해 공동체 의식을 다지고, ‘유교 이념의 현장’으로서 위상을 공고히 한다.


대성전부터 작은 기숙사방까지, 각 건물이 지닌 기능과 상징이 명확해 졌다. 덕분에 지식 전달뿐 아니라 예(禮)의 중요성을 일상으로 체화했을 것 같다.

부평 향교 탐방기

부평 향교를 둘러 보며, 오늘날 공부와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전통의 엄격함과 공동체 정신이 주는 울림은 지금도 유효할 듯 하다. 이 작은 공간에서 유생들이 쌓아 올린 하루하루의 성실함과 상호 협력은, 현대 사회의 학습과 팀워크에도 시사점을 줄 수 있을 듯 하다.

우리도 조선 유생들이 가졌던 '서로 피해 주지 않으면서 선의의 경쟁을 다지고, 조화롭게 함께 성장해 나아가고, 화합하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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