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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카에서 로부스타로

베트남 커피의 선택

by 한정호

베트남 커피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변화가 있다. 1857년 프랑스 선교사가 처음 심은 커피나무는 아라비카였다. 서늘한 기후와 부드러운 풍미를 가진 아라비카는, 처음엔 베트남 커피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베트남 커피 생산의 95% 이상은 로부스타가 차지한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1. 기후와 병충해에 강한 로부스타

아라비카는 까다롭다. 해발 1,000m 이상의 서늘한 기후를 선호하고, 병충해에 약하다. 특히 ‘커피 녹병(Coffee Leaf Rust)’ 같은 전염병에는 속수무책이다. 반면 로부스타는 다르다. 낮은 고도(200~800m)와 더운 기후에서도 잘 자라고, 병충해와 습기에 훨씬 강하다. 베트남 중부고원과 남부의 넓은 지역이 로부스타 재배에 적합했기에, 로부스타는 자연스럽게 농부들의 선택이 되었다.


2. 높은 생산량과 경제성

로부스타는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아라비카보다 높다. 이는 곧 농가의 안정적인 수익으로 이어진다. 관리도 비교적 쉽고, 대규모 농장과 집약 재배에 적합하다. 게다가 국제시장에서 인스턴트 커피 원료로 로부스타의 수요는 압도적이었다. 많이 생산할수록 수출 효율이 커지는 구조였다.


3. 국제 수요와 국가 정책

20세기 중반, 인스턴트 커피 산업이 급성장했다. 로부스타는 진하고 쌉싸래한 맛과 높은 카페인 함량 덕분에, 인스턴트 커피 제조에 제격이었다. 베트남 정부도 전쟁 이후 경제 재건 과정에서 로부스타 대규모 재배를 국가 정책으로 밀어붙였다. 1986년 ‘도이머이(Đổi Mới)’ 개혁 이후, 로부스타 생산량은 가파르게 증가했고, 마침내 세계 1위 로부스타 생산국 자리에 올랐다.


4. 아라비카의 한정된 땅

아라비카는 베트남 북부의 고산지대나, 남부의 람동(Lâm Đồng) 같은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가 가능하다. 국토 대부분이 아라비카에 적합하지 않으니, 대량 생산 체계에서는 로부스타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5. 오늘의 베트남 커피

현재 베트남 커피 생산 비중은 로부스타 95%, 아라비카 5% 미만. 아라비카는 소규모로 재배되어 프리미엄 시장이나 스페셜티 커피용으로 쓰이고, 로부스타는 여전히 대량 수출과 인스턴트 커피 산업의 주력 원료다.


한 잔의 베트남 커피 속에는 이런 선택의 역사가 담겨 있다. 아라비카로 시작했지만, 기후와 경제성, 그리고 국제 수요가 로부스타를 압도적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베트남의 거리에서 마주하는 진하고 달콤한 까페 쓰아 다 속에도, 이 로부스타의 뿌리 깊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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