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 배급이 아닌 지원과 나눔의 현장
오늘 아침 골목 어느 민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한 명 한 명 종이 쪽지 하나를 건네니 쌀자루같은 것을 건네 준다. 얼마 전에도 한 은행 앞에 많은 주민들이 모여 대기표(?)를 직원에게 건네곤 쌀 포대를 받아 저벅 저벅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아직 지방에는 식량 배급이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예전에 뉴스에서 본 듯한 사회주의 국가의 ‘배급제’ 같은 풍경이다. 하지만 지금 베트남에서 이런 모습은 과거와 다르다. 더 이상 ‘전 국민 배급제’는 없고, 대신 지원과 나눔의 풍경으로 탈바꿈한 것이었다.
배급제의 기억
1980년대 중반까지 베트남은 ‘tem phiếu(배급표)’를 통해 국가가 쌀·연료·설탕을 정량으로 나눠주는 체제를 유지했다. 흔히 ‘bao cấp 시대(배급의 시대)’라 불린다. 그러나 1986년 도이머이(Đổi Mới) 개혁 이후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이 배급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사람들이 마주하는 쌀 배포는 그 시절의 연장선이 아니라, 사회보장과 자선의 새로운 형태다.
지원과 나눔의 네 가지 얼굴
1. 국가비축미 지원
정부는 여전히 ‘국가비축청’을 통해 명절과 춘궁기(보릿고개)에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쌀을 지원한다. 인민위원회가 관리하는 빈곤 가구 명단에 따라, 마을회관이나 학교에서 수령한다. 종이를 제시하는 이유는 바로 이 명단 확인 때문이다.
2. 학생 쌀 지원 정책
산간·소수민족 지역의 학생들은 학기마다 정량의 쌀을 지원받는다. 공부를 이어가도록 돕는 교육 보장 제도다. 그래서 종종 학교 운동장 앞에 학부모들이 줄을 서서 쌀을 받는 장면이 연출된다.
3. 재난 상황의 긴급 지원
태풍, 홍수 등 재해가 닥치면 중앙·지방정부가 비축미를 풀거나 NGO가 현금·쌀을 배포한다. 이때는 일회성으로 배포되지만, 피해를 입은 가정에게 며칠의 끼니를 지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4. 자선과 종교단체의 나눔
코로나 시기에 널리 알려진 ‘쌀 ATM’은 자선의 대표 사례다. 사찰, 교회, 기업, 개인 기부자가 주도해 일정량을 무료로 나눈다. 이때도 혼잡을 막기 위해 번호표나 종이를 나눠주고, 그 종이를 보여주며 수령한다.
배급이 아닌, 공동체의 안전망
이제 사람들이 손에 쥔 종이는 과거의 배급표가 아니다. 행정의 명단 확인서일 수 있고, 학교에서 발행한 통지서일 수 있으며, 자선단체의 초대장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대상과 기간이 제한된 ‘지원’이라는 점이다.
이런 쌀 배포는 가난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공동체의 연대를 드러낸다. 쌀 자루 하나가 며칠의 밥상을 지키고,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고, 재난 이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다.
가끔 KNG Mall 앞 광장에서 마을 할머니들이 주민들에게 생필품들을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서, '어르신들이 봉사활동을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에 나도 그 분들께 빵과 음료를 드린 경험이 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 모습을 내게 보여준 분들에 감사하는 마음에서였다.
길거리 식당이나 음료 가판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 다가와 복권을 내밀거나, 간단한 안주거리를 파는 아이들이나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 잡상인들을 내쫒지 않는 주인과 직원들, 꺼리김 없이 복권이나 안주거리를 사주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예전에 우리가 간직하고 있던 '정(情)'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도 그렇게 어렵게 살고 서로 보듬으며 살아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잊혀진 마음을 다시 한 번 불러오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