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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Feb 23. 2023

수줍은 꽃

월간 지음지기: 2023년 2월 “고백"




그 여자


여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을 함께 나눈 이에게 문자 했다. 막 끝난 저녁 식사에 관한 내용 대신 앞으로 두 사람 앞에 차려질 저녁 식사 자리에 관한 기대가 주된 내용이었다. 걸핏하면 오래된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추억을 회상하기 좋아하는 여자가 그런 문자를 보내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보내자마자 1이 곧바로 사라졌다. 화면을 바라보는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찬장에서 유리 꽃병 하나를 꺼내왔다. 저녁을 함께 나눈 이가 은은하게 어두운 조명 아래서 알록달록한 튤립 여덟 송이 묶음을 건네던 풍경을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하며 꽃다발의 허리춤을 풀었다. 튤립은 평소 여자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좋아하는 데 굳이 이유가 필요할까 싶지만, 굳이 대답하자면 꽃봉오리가 꼭 씨앗을 닮아 결실과 시작이 한 데 어우러지는 모습이 신비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색감도 다른 꽃들보다 유독 쨍한 게 정직한 인상을 주었고, 생화도 조화도 아닌 어느 화가의 작품을 보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또 튤립을 준비했지, ' 하는 생각에 여자는 다시 한번 웃었다. 한 송이씩 분해한 튤립 봉우리에 코를 가져가 보았다. 그런데 향이 나질 않는다. '향이 강한 꽃은 아니니 그럴 수도 있는 걸까.' 다시 숨을 들이마셔 봐도 여전하다. 향은커녕, 물기 머금은 촉촉한 기운, 뿌리 뽑힌 꽃들이 한 데 모여 있더라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특유의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제야 여자는 손에 든 튤립을 눈으로 면밀히 살폈다. 줄기와 봉우리가 이어지는 부분에서 불투명한 덩어리 하나를 발견했다. 손으로 건드려보니 톡 하고 떨어지는 그것, 실리콘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 식사 풍경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프라이팬 위에서 마늘이 기름에 달궈지던 소리도 났고, 재즈 풍의 배경 음악에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 들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상대방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조명은 상대방의 얼굴과 접시만을 간신히 비추는 정도였으니 어두운 편에 속했다. 여자가 앉은 식탁 위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녁을 함께 나눈 이가 오랜 썸 끝에 큰 결심을 하고 나온 자리였고, 여자도 그걸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안부를 주고받은 뒤,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꽃다발이 전달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처음으로 건넨 꽃 선물이 조화라니. 그걸 집에 와서야 눈치채다니.' 


여자는 꽃병에 물을 담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선 튤립의 플라스틱 대를 아까 풀었던 꽃다발 허리춤으로 돌돌 감았다. 리본 매듭까지 짓고 나니 제법 촬영 소품 부케 같아졌다. 빼곡히 들어선 책장 속 책들 윗 공간에 튤립 부케를 살포시 눕혀 두고선 사진을 찍어 보냈다. '집에 와서 꽃 향기를 맡아보려고 하는데, 이 튤립, 향이 안나는 튤립이다?' 하고 1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1을 보냈다. 여자는 향기 없는 꽃에서 지금껏 향이 났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봤다. 아무래도 함께였기에 그랬던가, 하는 쪽에 해석이 쏠렸다. 





그 남자


남자는 생각했던 것보다 5분 늦게 사무실을 나왔다. 여자가 자기보다 일찍 약속 장소 근처에 도착해 주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다는 문자를 막 받은 참이라 마음이 급했다. 기다리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하철 입구에 놓인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가기에 앞서, 우회로에 진입했다. 퇴근길 손님을 붙잡기 위해 형형색색의 꽃들을 가게 매대 앞쪽까지 진열해 놓은 꽃집이었다. 형형색색의 튤립 옆에는 유치하지만 꽃집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메시지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사랑을 이루어 주는 꽃다발이라.' 

남자는 오른손 엄지로 휴대폰을 켜더니 삼성페이 앱을 실행하고선 지문 인식을 마쳤다.  


늦여름이라지만 여전히 새햐안 구름이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날씨였고 거리에도 더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경복궁 역에 내린 남자는 약속 장소로 빨리 걸었다. 여자를 드디어 만났고, 이따금 어깨를 부딪히는 거리에 서서 여자와 나란히 걸었다. 예약한 식당을 방문해 가격표 신경 않고 맛있는 조합으로 요리도 몇 개 시켰다. 눈을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시작되고 식당의 분위기에 적응을 할 즈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에 남자는 튤립부터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는 길에 주려고 샀다는 말과 함께 수줍게 웃자, 여자도 따라 웃었다. 이쁘다면서 튤립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인 건 또 어떻게 알았냐면서. 


식당을 나오는 길, 남자는 여자가 튤립을 두 손으로 꼭 쥐고 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이 건넨 선물을 소중히 하는 것 같아 기뻤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더 이상 숙제를 미뤄둘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여자 쪽으로 자신과 연인이 되어 보지 않겠냐며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남자의 빈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가득 채워주며 긍정의 대답을 건넸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남자는 지하철에서 헤어진 여자가 집에 도착하고 본인 또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문자를 주고받았다. 얼떨떨했다. 꽃집의 메시지가 예언처럼 들어맞은 기분이 들어 기뻤다. 


그때, 여자에게서 또다시 문자가 왔다. 내용은 다소 당혹스러웠고, 그 때문에 괜히 웃음이 났다. '그게 조화였다니. 사장님도 참, 조화에 그런 메시지를 자신 있게 써 붙여놨었다니.' 몇 시간 동안 여자와 함께 있으면서 바라봤던 꽃다발인데 이제야 꽃다발의 정체를 안 상황, 자신도 여자도 긴장했었단 사실이 그저 귀여웠다. 남자는 다음번 꽃은 향기가 나는 것으로 준비할 테니 오늘의 튤립은 기념품처럼 오래 간직하는 약속의 증표 같은 것으로 보관해 달라며 답장했다. 1이 생긴 자리가 금세 비워졌고, 여자도 남자도 한동안 ㅋㅋㅋ를 잔뜩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2019년 8월 29일, day 1의 해프닝이었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ㄱ(기역)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글의 출발점이 된 그림은 최정연 작가의 "수줍은 꽃"입니다."수줍은


 꽃" 그림 보러 가기: https://blog.naver.com/choijungyon/223018008480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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