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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Sep 21. 2023

오래된 아파트가 처음은 아니라서

월간 지음지기: 9월 "동네 한 바퀴, 압구정"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발가락 끝을 땅과 수직으로 세운 뒤, 신발을 톡톡 두들겼다. 발이 쏙 들어가고, 뒤꿈치에 밟혀 움츠러들었던 운동화 가죽이 천천히 펴졌다. 잠깐 구겨졌을 줄 알았는데 그새 주름이 졌다. 등 뒤로 아빠의 배웅 인사가 들렸다. 


“수업 마치면 압구정 역으로 와.” 


평소와 다른 인사. 그러고 보니 이삿날이었다. 어깨 생각을 전혀 안 했는지 백팩 대신 가죽 핸드백을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전공 교재를 따로 담은 파일을 왼팔에 끼고 다니던 시절이었고, 다음번에 핸드폰을 바꾼다면 생애 첫 스마트폰을 갖고 싶다고 얘기하던 때였다. “너는 학업에 전념해라, 이사는 우리가 할 테니,” 하던 아빠의 당부는 “집에 잘 찾아오기나 해!” 하는 농담과 함께 나를 강의실로 밀어냈다. 애석하게도 시간표가 참 빡빡했던 그날, 압구정역에 도착한 건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나서였다. 


이사한 집보다도 집 근처 식당을 먼저 찾았다. 아빠에게서 식사하고 있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였다. 2번 출구로 나와 돌아서자마자 대로변이 보였고, 그쪽으로 걷다가 건널목이 보이는 곳에서 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궁서체로 동그란 간판 안에 ‘먹자골목’이라 적은 예스러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감자탕 가게는 입구부터 소란스러웠다. 활짝 열어젖힌 출입문 뒤로 아빠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왔나?” 


이미 한바탕 끓여 먹은 듯한 감자탕 냄비 옆으로 가 앉았다. 벌써부터 맵고 알싸한 마늘 기운이 느껴지는 게, 양념 맛이 꽤나 센 듯했다.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는 작은 외삼촌과 나의 도착을 반기는 엄마와 외숙모의 얼굴이 보였다. 테이블 가운데엔 가족들이 야무지게 파먹은 돼지 등뼈가 냉면 그릇 안에서 거대한 탑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 사는 동안엔 맛있는 감자탕은 원 없이 먹겠는데?’ 


잘 발라먹은 돼지 등뼈와 검은 뚝배기 한 그릇.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MBC <무한도전>의 주 무대 중 하나로만 알고 있던 동네의 인상이 맛있게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감자탕 가게 뒤편 건널목을 지나면 곧바로 구현대아파트였다. 흔히들 현대백화점을 기준으로, 가로수길 방향 쪽으로는 신현대, 로데오 방향 쪽으로는 구현대라 부르는 아파트 단지의 일부였다. 세대나 시대를 구분하는 것도 아닌데 붙이다니, 이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옛것과 새것이 한 동네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 괜히 의미부여를 해보기도 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 역사를 닮은 닮았군? 한 데 모여 살고 있으니, 어쩌면 역사보다도 더 대단한 걸지도,’ 하고서. 


좁은 이차선 양 옆으로는 보행로 두 개가 나 있었다. 그중 건널목과 가까운 쪽에 있던 보행로로 걸었다. 아빠는 돌연 내비게이션이 되었다. 직진하다가 찻길을 하나 건너고 압구정 터를 지나면 신사시장이 보이는데, 왼편에 있는 동이 우리 집이라고 했다. 오래된 아파트 옆에 오래된 길. 보도블록의 높낮이는 고르지 않았고 폭도 상당히 좁았다. 아파트보다 더 높이 자란 일본전나무가 단지 내 유일한 빛(주홍빛 가로등)을 가린 탓에 제법 어둑어둑하기도 했다.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무리가 있다면 길 옆으로 잠깐 비켜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여나 세게 밟은 시소처럼 튀어 오르는 보도블록을 밟을까 걷는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울퉁불퉁하고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하지만 나를 다른 곳도 아닌 집으로 데려다주는 통로였으니, 알고 보면 친절한 길이었다.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오늘부터 우리 집이 될 곳, **동 앞에 섰다. 우편함, 택배, 복도, 주거 공간, 비상계단… 무엇이든 양 옆으로 펼쳐 놓고 싶다는 듯, 찢어 놓고 싶다는 듯, 좌우로 길쭉한 복도식 아파트였다. 계단을 오르고 관리사무소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 낯선 주변을 살폈다. 


이제 막 저녁식사를 마친 듯한 일층집에선 창문 틈으로 생선구이 냄새가 새어 나왔고, 입주민 공지문 위의 투박한 시계(a.k.a. 부동산 시계)에선 탁탁 초침 소리가 났다. 철제 우편함은 베이지색 페인트가 많이 벗겨져 있었고, 그 아래 바닥엔 자그마한 우편함에 들어갈 리 없는 택배 상자들이 늘어져 있었다. 송장 스티커 위엔 검은색 매직으로 적은 숫자가 보였는데, 아마도 택배를 받는 사람이 사는 호 수 같았다. 택배원의 기도가 서린 풍경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관리사무소를 지나, 우편함과 택배 상자 사이를 걸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이들에게 부치는. 그들이 부디 단번에 제 물건을 찾아갈 수 있길 바란다는 내용의. 


‘웨스 앤더슨 감독이 택배 회사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면 참고할 만한 풍경이야. 물론 색은 좀 더 알록달록하게 쓰겠지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70년대 개발 이전엔 과수원과 채소원으로 가득했다던 땅이지만, 지금은 강남의 노른자위 땅이라며 화려하게만 비치는 동네. 엘리베이터 도움으로 이전보다 조금 더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외벽의 금 자국부터, 손 떼 묻은 흰색 벽, 밤 산책을 위해 천천히 걸어 나오는 노부부의 정수리, 現代 라 적힌 글씨까지. 그간의 세월이 눈에 하나둘씩 들어왔다. 오래된 아파트가 처음은 아니라서 익숙했다. 새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감을 느꼈다. 


‘저 쪽이 한강일까?’


산책 루트부터 살폈다. 이사업체가 마구잡이로 옮겨 놓은 짐들을 정리하려면 며칠이 걸릴 텐데 말이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ㄷ(디귿)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동네 한 바퀴, 압구정"에 관한 또 다른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그리운 놀이터, 금손공방> / 최정연: https://m.blog.naver.com/choijungyon/223204798097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그램: http://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지음지기 포트폴리오: writtenndrawnby.notion.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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