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음지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로이데 전주현 Oct 05. 2023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

월간 지음지기: 10월 "동네 한 바퀴, 압구정"

  조선 9대 왕 성종 치하, 갈매기가 날아드는 한강 근처에는 압구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당대 권력의 실세였던 한명회의 호와 같은 이름을 한 것이었지요. 전국 각지에서 그 정자를 찾았다고 합니다. 한명회에게 벼슬 한 자리 구걸하기 위해서 말이죠. 벼슬을 버리고 자연을 벗 삼아 지내려던 한명회의 계획은 쌓여만 가는 금은보화 뇌물로 사실상 실패했습니다. 뇌물이 먹힌다는 소문이 돌자, 정자 앞은 갈수록 시끌시끌해졌죠. 왕권을 위협할 만큼 기세등등해진 한명회는 결국 성종의 눈 밖에 났습니다. 일련의 사건들로 압구정도 허물어졌죠. 


  대신 이름이 남았습니다. 오늘날까지요. 압구정동, 압구정역, 압구정 고등학교, 압구정 김밥 …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지하철 역 승강장 벽면에 정자의 모습이 타일 아트로도 조금 남아 있어요. 그리고 정자의 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압구정 터’라는 한자가 적힌 비석이 남아 있지요. 재미있게도 그 비석은 하나의 거대한 숲과 같은 구현대아파트 단지 내 녹지 공간에 있습니다. 식후 산책이라도 한답시고 집을 나서 아파트 사이사이 골목을 걷다 보면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곳이죠. 


  흑심을 품은 사람들로 가득했을 곳이 이젠 모두에게 열린 공원이 되었습니다. 보란 듯이 말이죠. 벤치도 몇 개 놓여 있고 아주 넓진 않지만 공터도 있어 걷기 운동이나 가벼운 맨손 체조, 줄넘기 운동을 하기 좋지요. 그렇지만 절대로 북적이는 법은 없어요. 대로변에선 꽤 멀리 떨어져 있고, 이삿짐 지게차 말고는 차량 통행이 불가하거든요. 그쪽으로 자주 걸었습니다. 오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곳을 서성이다 보면 저 또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를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상상했거든요. 

 

 적당히 붐비고, 적당히 한적한 압구정 터를 찾은 건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파트만큼 키가 커버린 일본식 전나무, 그 아래 웬만한 관목보다도 존재감이 센 잡초 무리와 개나리 덤불과 잔디, 그리고 찻길 주변을 가득 메운 은행나무 일대 전체를 집 삼은 생명이 있었거든요. 


  길 고양이였습니다.


  엄마는 어릴 적 셰퍼드 한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를 한 집에서 사이좋게 키워냈다고 했죠. 아빠도 추운 겨울날 따뜻한 새끼 고양이 한 두 마리 품에 안고 졸아본 경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엔 있었던 반려동물들이 왠지 제 어린 시절엔 없었습니다. 당시 제 책장을 가득 메운 건 동식물 도감들이었지만, 가족사진을 찍을 때 무릎 위에 올려놓을 강아지 한 마리, 심지어 화분 하나 없었죠. 한 아이의 도시 성장기에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푸릇푸릇한 생명이 괜히 부족하곤 했어요.


  집 안에 살랑이는 꼬리가 보이질 않고 그르릉 하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게 내심 아쉬웠었죠. 아쉬운 마음에 곤충이라도 입양하려고 했던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놀이터에서 잡아온 개미 몇 마리와 비 온 뒤 운동장에서 잡았던 달팽이 한 마리 같은 거였지요. 함께 현관을 지나 집에 들어왔는데, 분명 침대 옆이나 베란다 화분 위에 고이 두었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자취를 감춰버리던 녀석들이었죠. 하는 수 없이 직립보행의 생명만이 가득한 집을 멕시멀리스트의 물건들로 채워 넣었습니다. 


  최소한의 가족과 물건들과 부대끼며 사는 삶. 오래도록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냐옹 소리를 내며 애교와 경계심을 반반 섞어 사는 길고양이들이 가득하다니요!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쳐 본 적 없는 옆 집 아주머니와, 밤마다 쿵쿵 뛰어다니느라 바쁜 윗집 아이들을 알아가는 것보다 설레었습니다. 젖소처럼 얼룩무늬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 노랗게 익은 가을 들판의 옷을 입은 고양이, 재규어처럼 새까만 고양이, 전형적인 한국 삼색 저고리의 고양이… 가까이서 보니 하나같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몸놀림이 날쌥니다. 압구정 미묘라 부를 법한 외모였어요. 


  평소에 “강아지, 고양이, 네 취향은 어느 쪽이야?”라는 질문을 많이들 주고받잖아요. 서로를 알아가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어볼 겸 말이죠. “둘 다 좋은데.” 하면서 답변을 유보하다가 언젠가부터 “고양이!”라고 확답을 하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아무래도 압구정에서 함께 사는 길고양이들 덕분이지 않을까 해요. 

특히 압구정 터를 비롯한 아파트 단지 내 녹지 공간에 숨어 사는 고양이들은 밤낮으로 빛과 함께 뒹굴며 지내는데, 그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햇살 아래 잔디밭에 누워 하품하는 모양은 꼭 어느 동물원에서 보았던 사자의 하품을 닮았어요. 하지만 사나워 보이는 하품 이후에 눈을 끔뻑 끔뻑 감다가 결국 꾹 닫아버리는 졸음 풍경은 역시나 고양이입니다. 


  저녁이 되고 가로등에 오렌지 빛 불이 들어오면 고양이들의 분위기가 더 살아납니다. 안 그래도 고풍스러운 몸놀림이 따뜻한 오렌지 빛 조명 덕에 더 생동감 있어 보입니다. 대낮 중엔 잔디밭 바깥으로 산책 나오지 않던 새끼 고양이들도 어둠이 오렌지 빛과 섞이기 시작하자 슬금슬금 어미 고양이의 뒤에 붙어 나오기 시작해요. 저녁 찬거리를 사러 슈퍼마켓으로 향하다가 형제들과 한참 신나게 놀고 있는 새끼 고양이들을 발견하면 눈이라도 마주치는 날엔 그 자리에서 내적 샤우팅을 시작합니다. ‘저 귀엽고 꼼지락 거리는 건 뭐야! 귀여워!!!!!!!!’ 발걸음 소리에도 화들짝 놀란 눈을 하는 고양이 가족 앞에서 호들갑을 떨 순 없으니깐요.


  어릴 적 꿈꿨던 만큼 길 고양이에게 가까이 다가가진 않고 있어요. 아무래도 집 고양이가 아니다 보니, 사람 손을 너무 타버리면 야생에서의 생존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길 고양이도 (제 아무리 동네 주민이라곤 하지만) 제게 마음을 다 주진 않아요.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이잖아요, 제가 입양을 할 게 아니라면 사실 길들여져선 안 되는 생명이잖아요. 예뻐라 하는 마음이 한가득이더라도 그들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 게 우선이겠다 싶어요. 괜찮습니다. 가까운 자리를 지키면서 제 손으로 직접 만지고 쓰다듬는 것도 애정 표현이겠지만, 멀리서 지켜보며, 대상의 안위를 살피는 것도 분명 사랑의 마음 쓰임일 테니깐요.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ㄷ(디귿)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동네 한 바퀴, 압구정"에 관한 또 다른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도산의 말씀> / 최정연: https://m.blog.naver.com/choijungyon/223218687270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그램: http://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지음지기 포트폴리오: writtenndrawnby.notion.site

매거진의 이전글 오래된 아파트가 처음은 아니라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