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음지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로이데 전주현 Jun 15. 2023

날개로의 초대

월간 지음지기: 2023년 6월 “아침식사 #3”

간장 종지에 수돗물을 가득 채웠다. 그릇의 목에서 물이 찰랑 하고 춤을 췄다. 평소 같았으면 춤사위를 숨죽여 지켜보는 관객 역할을 맡았을 슈페트였지만, 지금은 공연장의 난봉꾼을 자처하는 입장이었다.

 

쏟으면 또 얼마나 쏟는다고.

 

슈페트는 실외기 위에 종지를 내려놓았다. 철제 위에 그릇, 차가운 것 위에 또 차가운 것이 올라서자 검을 맞댄 기사들의 소리가 났다.

 

조심성이 없었나?

 

슈페트는 눈앞의 생명체 눈치를 봤다. 보통 새였더라면 날아갔겠지만 녀석은 달랐다. 가만히 있었다. 마법이 풀린 직후의 우리 모두가 꽤나 취약하듯이 말이다.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물체와 거대한 인간이 궁금하기보단, 방금 전까지 자신을 잠재운 지형지물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고 싶을 뿐, 다섯 손가락과 찰랑이는 물의 춤사위엔 경계심을 가질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릇 앞까지 발톱 소리를 내며 걸어와 부리를 벌려 물을 마시기까지. 꿀꺽하는 목 넘김 소리가 들리지 않은 걸로 보아 허겁지겁 들이키는 건 아닌 듯했다.

 

가까이서 지켜보니 10센티는 족히 넘어 보였다. 검은 머리에 흰 뺨을 한 얼굴 부분과 다르게, 날개와 어깨, 등 부분은 푸른빛이 감도는 회색이었다. 목에서 배 쪽으로 이어지는 몸통 앞부분은 흰 셔츠에 검정 넥타이가 꼭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너 말이야, 옷은 점잖게 갖춰 입고선 비행 실력은 그게 뭐냐? 명색이 매로 태어났는데 병아리처럼 울어 대던 애기들처럼 말이야.


새는 슈페트의 때아닌 독백에 물 마시기도 멈추고선 베란다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이 검은 머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기에 두 생명체가 눈을 마주쳤는지까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관심을 기울이는 눈치이긴 했다. 곁을 지키던 용사를 공주가 알은 체하고서 씩 웃어준다면 저럴까.

 

우리 사람들끼린 옷이 날개라는 얘길 자주 해. 멋지게 차려입었으니 달라 보인다는 말인데, 그게 표현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아. 날개가 없으니 물리적으로 공중에 떠 있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나도 알아. 설마 그걸 모를까 봐.


새가 독백에 대꾸하는 듯한 낌새는 없었지만, 슈페트는 물을 마시다 말고 자기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새에게서 왠지 모를 고마움을 느꼈다.


내 말은 차려입었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벗어던지고 까발릴 수 있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야. 껍데기가 있다는 건 그게 감싸고 있던 무언가가 따로 있었단 거고. 나는 그 무언가가 내 옷이 되었으면 해. 내밀하고 꾸밈없는 그 옷을 입고도 날아오르는 기분이 받는다면, 얼마나 자유롭겠어! 살아야지요, 하는 의지에 힘을 더하는 그 기분 말이야. 그걸 누리고 산다면야 아마 나도 너처럼 정신없이 날았을지도 모르겠다.


새를 향한 독백이 눈높이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슈페트는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어 둔 핸드폰 전원이 슬쩍 건들렸는데, 주머니 바깥으로 튀어나온 잠금 화면이 휙 하고 눈에 들어왔다. 아날로그 모양의 디지털시계가 시침과 분침을 12가 그려진 방향으로 곱게 포개고 있었다.


사람들 표현에 네가 더 충실할 수도 있겠다. 날개도 가졌고, 근사한 턱시도도 항시 차려입고 있고.

 

새는 가슴을 조금 부풀리더니 고개를 들어 슈페트의 핸드폰 화면과 얼굴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마시던 물로 부리 주변과 흰 뺨까지 촉촉이 젖어 있는 게 보였다. 병아리를 닮은 아기 매들이 어미새의 입에서 자신의 입으로 특식을 간신히 전달받은 뒤 부리 주변이 지저분해져 있던 모습과 닮았었다.

 

친구, 아침 먹고 갈래? 남들은 점심 먹을 시간이라 하지만 난 지금이 첫 끼라서. 우리 딴에는 밋밋한 등에 날개를 다는 루틴이야. 뭐라도 챙겨 먹으면 도움이 되거든. 유리창에 쿵 하더라도 다시 물을 마시러 올 의욕이 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야.

 

얼리버드(early bird)란 표현이 무색하게도, 새에게 ‘점심 아닌 아침’이자 ‘아침 아닌 점심’을 권했다.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ㄴ(니은)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특별히 2023년 6월, 한 달간은 "아침식사"를 주제로 한 연작 글 네 편과 그림 네 개를 선보입니다.



"아침식사"를 주제로 한 그림이 궁금하다면?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그곳에서의 아침>, 최정연: https://m.blog.naver.com/choijungyon/223129839647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지음지기 인스타그램: http://www.instagram.com/drawnnwrittenby/

지음지기 포트폴리오: writtenndrawnby.notion.site


매거진의 이전글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