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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Dec 06. 2023

소망이 가득한 골목

월간 지음지기: 12월 "동네 한 바퀴, 압구정"

  누군가 내게 약속의 주소를 대라고 하면 아마 나는 이렇게 답했을 거다.


  “토요일 오후 네시 선교관 2층과 토요일 오후 열두 시 선교관 2층이요.”


  하나는 대학생 시절, 또래들과 신앙을 키워갔던 소망교회 대학부의 예배 일정이고, 또 다른 하나는 3년 간의 연애 후 가정을 꾸리기로 약속했던 결혼 예배 일정이다. 나와 다른 전공을 공부하고, 성장 배경이 다르고, 관심 분야나 강점도 다른 친구들과의 교류가 가능했던 공간에서 서로를 생의 짝꿍으로 삼은 이와 서약을 하고 행진을 했었다니! 하객들은 알기나 했을까, 버진로드라고 꾸며져 있던 선교관 2층의 가운데길이 내가 매주 토요일 오르락내리락하던 예배의 길이었다는 걸?


  장소만 같았지, 엄연히 다른 일정이 아니냐며 반문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어디를 가든 꼭 있다). 하지만 대학부가 결혼을 결심하기까지 나의 영혼과 생각을 달래고 단련시켜 주었던 곳임을 상기해 본다면 두 예배 간 연결고리를 의외로 쉽게 찾아진다. 나를 알아가고 공동체 생활을 배워가는 대학부 시절이 있었기에, 생의 큰 결단을 내리고 관계를 확장해 나가는 결혼식을 용감하게 치를 수 있었다. 먼 과거의 내가 있었기에 가까운 과거의 내가 가능했던 것이다.


  대학부와 결혼식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도록 공간을 내어준 곳은 압구정 소망교회다. 20대부터 덜컥 시작된 게 서울살이인데 압구정살이라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소망교회 출석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보니 집 근처에 믿을만한 교회로 소망교회가 있었고, 기왕이면 가까운 곳을 예배당 삼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연고 하나 없는 교회로의 출석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1년에서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방황 아닌 방황을 했다. 그러다가 어색함을 견디고 견디다가 정착한 곳이 소망교회였다.


  광역시라지만 지방에서, 청년층보단 어르신들의 비중이 큰 교회를 출석하다가 서울의 대표 대형 교회로 출석하기 시작했을 때의 그 어벙벙함이란! 대학교 캠퍼스를 처음 거닐었을 때보다 소망교회를 알아가면서 더 많이 놀랐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어찌나 체계적으로 작동하는지! 예배의 규모는 물론이고, 하나의 거대한 미로 같았던 지하 통로들(선교관과 본당을 연결해 주는 통로가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친교실과 연습실, 식당 등 다양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세분화되어 있는 훈련 및 양육 프로그램, 왠지 모르게 더 장난스럽고 성숙하기까지 한 또래 친구들,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페와 김밥집, 도서관까지 … 놀라웠다 정말.


  특별히 교회 건물들로 가득 차 있는 골목, 압구정로 36길을 나는 소망이 가득한 골목이라 불렀다. 그곳은 압구정역 2번 출구 또는 3번 출구로 나와 갤러리아 백화점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는 블록의 안쪽에 위치해 있는 일대로, 신구중학교 입구와 아우어베이커리 압구정소망점에서부터 신사무궁화공원이 자리한 지점까지 곧게 뻗은 길을 일컬었다. 압구정로 36길을 지날 때마다 나는 교회를 가는 길이 아니었어도 괜히 옷매무새를 점검하곤 했다. 간판마다 소망이란 글자가 보였고, 본당 위에 크게 자리한 십자가가 “어, 주현이 왔니?” 하고 인사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알게 모르게 예배의 기운이, 약속의 기운이 나를 휘감았다.


  아, 오해할까 봐 덧붙이는 말이지만, 그 기운이라는 건 나를 옥죄거나 감시하는 억압적인 기운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안아주는, 다독이는 좋은 기운이었다. 거리 전체가 나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양 한 마리가 된 것 같다고 할까? 현관 바깥에, 차도 지나다니고, 길고양이도 어슬렁 거리는 골목 전체가 언제든지 쉬었다 갈 수 있는 예배당이란 건 큰 위안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퍽 하면 찾아가는 아지트 같았다.


   소망이 가득한 골목 중 약속의 주소지가 되어준 선교관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은 골목 가장자리, 본당 앞 주차장 건너편이자 신사무궁화공원 옆에 위치하고 있는 소망도서관이다. 외관은 컨테이너박스처럼 생겼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잔잔한 피아노 음악이 나오는 도서관이 나오는데, 크기가 아담해서 그렇지, 시청에 딸린 서울도서관이나 기타 대학 도서관의 분위기와 다를 바가 없는 훌륭한 공간이다.


  단정한 나무 책장들, 과하게 밝지 않은 테이블 조명, 적절한 위치에 비치된 콘센트가 책상 자리에도, 신발을 벗고 올라가 나비다리를 하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자리에도 넉넉하게 마련되어 있다. 회원권 접수처도 있고 회의실 자리도 하나 보이고 DVD, 정기간행물, CD, 그리고 분야별 책까지. 빠지는 게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붐비질 않는다. 문 두 개만 열고 나가면 요란스러운 간판들과 병원 광고판들이 번쩍이고 있는데, 어쩐지 도서관 내부는 그와는 동떨어져 있는 섬처럼 고요하다.


  작업실을 떠나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을 때, 그나마 나를 알아주는 골목을 통과해 소망도서관에 다다르는 여정. 괜찮은 탈출이고, 괜찮은 이동학습이다. 다섯 시 마감을 앞두고 사서 분들의 빠른 퇴근을 고려하여 오후 네 시 반부터 짐을 싸서 나오는 길 또한 괜찮은 기분전환이 된다. 도서관을 향할 때도, 나올 때도 소망이 가득한 골목을 관통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약속의 무대가 된 선교관을 옆에 끼고서 지나다닌다. 그때마다 괜히 대학부 시절과 결혼식 당일의 배움과 결단, 약속들이 떠올라 숙연해지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내가 걷는 이 길은 보통 길이 아니지, 그렇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고, 단지 잊고 있지만 않으면, 명심하고만 있다면, 한 발 한 발 걷는 시간이 금세 초현실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무궁무진한, 뭐, 그런 길이고 시간이지.’


  집이라 부르는 곳 근처에 이런 산책로를 두고 있다는 게 정말이지 큰 감사가 아니면 무얼까!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ㄷ(디귿)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동네 한 바퀴, 압구정"에 관한 또 다른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TBN> / 최정연: https://m.blog.naver.com/choijungyon/223264310516






“함께 그리고 씁니다. 개인의 일상을 연결합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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