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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Nov 23. 2023

동호대교도 그렇고, 모든 게 오렌지

월간 지음지기: 11월 "동네 한 바퀴, 압구정"

  십 년 전. 나는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발아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길이 있단 게 믿기지 않았다. 어디 보통 길인가, 휑 하니 지나다니는 기차가 줄줄이 있고,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 길 아닌가. 지면 위를 걷다가 신발 끝으로 톡 하고 땅을 두들겨 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이 땅이 무너지더라도 가장 먼저 다칠 사람은 땅 아랫사람들이잖아.‘ 지하철이 낯설었던 상경러는 집에서와 달리 겁이 많았다.


  다행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서울살이 중 시도 때도 없이 나의 두 번째 발이 되어준 지하철에 마음을 내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울역과 집을 중심으로 1호선과 2호선, 4호선에 익숙해질 무렵, 덜컥 다가온 압구정살이. 이젠 3호선과 친해질 시간이었다. 신속하고 정확한 지하철 이용을 위해선 내 눈이 이용하려는 지하철 노선의 대표 컬러를 어디서든 잘 찾아내는 게 중요했다. 압구정, 3호선의 색은 오렌지 색이었다.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어디서든 한눈에 들어오는 산뜻한 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상생활 중에 오렌지 색을 볼 일이 잦았던가?


  올림픽 중계방송 중에서도 동계 올림픽의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를 볼 때, 해당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네덜란드 선수들 때문에 화면이 오렌지 색으로 가득 찬 기분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생활 풍경 중에서는 기껏해야 형광펜이 잔뜩 칠해진 프린트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압구정을 동네 삼기 시작한 이후 나는 오렌지 색과 확 가까워졌다. 나를 태우자마자 동호대교를 건너는 3호선과 동호대교 위의 철골 구조물(이것도 오렌지 색이다)의 공이 컸다.


  3호선은 압구정역에서 옥수역으로 혹은 옥수역에서 압구정역으로 나를 실어 나를 때마다 지상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는데, 그때마다 가슴이 뻥 하고 뚫렸다. 지하철이니 응당 지하로만 다닐 줄 알았던 게 드넓은 한강 표면을 반짝하고 비춰주면서 시원하게 달려 주다니! 고마웠다. 특별히 3호선 안에서 동호대교를 지나고 있는 시간대가 노을이 지는 초저녁의 시간대일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적당히 어두워진 하늘이 집중력을 향상시켜주었고, 그제야 내가 살고 있는 곳, 서울을 한눈에 담는 기분이 들었다. 한강도 동호대교도 내 마음도 오렌지처 발그레 익어 간다는 생각에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하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압구정과 오렌지 색 하면 빠질 수 없는 압구정 오렌지족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교과서나 다큐멘터리에서만 주로 접했기에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도통 알 길이 없었던 한국의 옛 모습들을 한 데 모아 영상으로 제작해 놓은 유튜브 동영상들이 때마침 많이 보였다. 그중 90년대 압구정 오렌지족에 관한 영상을 보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서양 오렌지처럼 나긋나긋하고 상큼한 향을 풍기고, 외국물을 잔뜩 먹은, 부모의 경제력 혜택을 받아 과감한 소비를 하는,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오렌지를 건넸다는, 외제차를 몰고 압구정 일대를 누볐다는,‘ 사람들. 처음 걸었던 압구정에서 허름하지만 정감 있는 올드 타운 같은 느낌을 받았던 터라, 오렌지 족이 누볐을 휘황찬란하고 소란스러운 압구정은 딴 세상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대학원에서 느꼈던 당혹스러움도 함께 떠올랐다. 고민 끝에 진학했던 대학원에는 유독 해외 거주 및 수학 경험이 많은 친구들과 외국인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영어 반 한국 반의 문장력을 구사하며 한국에 관한 내용도 한국어보다는 영어로 읽는 게 편하다고 했다(이탤릭체로 되어 있던 지명을 천천히 읽다가 그게 전라남도였다는 걸 알고선 현타에 빠졌던 나와는 달랐다 확실히). 어느 한 수업에선 초중고대를 한국에서 나온 학생이 나뿐이라는 게 밝혀졌는데 그때 다들 나를 보고 찐 한국인(real Korean)이라던 것도 기억났다. 영상에서 봤던 오렌지족과 묘하게 겹쳐지는 모습들에 잠깐이나마 대학원 건물을 드나들던 그 많은 친구들이 지금은 무얼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80년대엔 바나나가 귀했고 90년대엔 오렌지가 귀했다지만 지금은 오렌지가 골목 상점에도 진열되어 있을 정도이니, 오렌지족이 널리 널리 퍼져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애당초 오렌지족이라는 꼬리표를 누군가에게 붙이는 것도 딱히 필요한 작업처럼 보이진 않고.


  일상 속 오렌지 색으로 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고민 중에 창밖을 한번 내다보았다. 생각 전환엔 자연 만한 것이 없지만,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없는 상황이니 (마감은 늘 그렇듯 나를 책상 앞에 앉혀 두니까) 아파트 단지 내 자연이라도 눈에 담아두려는 것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알록달록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가로수들이 보였다. 여름의 색을 군데군데 간직한 나뭇잎들 사이로 벌써부터 겨울을 준비하는 부지런한 얼굴들이 보였다. 짙은 갈색과 연한 노란색도 있었고 붉은 단풍색이 되기 전의 오렌지 빛 단풍잎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찾아다니지 않아도 성큼 내 곁을 지키는 오렌지 색으로는 가을이 있었다.


  동네만큼 나이를 먹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 내 가로수들이 올 가을엔 어떤 오렌지 색의 옷을 입을까? 그리고 그 오렌지 옷 아래를 지나다닐 나는 어떤 구두를 신고 가방에 무엇을 담고 걸을까? 수많은 은행나무 열매를 지뢰 찾기 게임하듯 피해 다니고 가방에 담은 일기장 하나와 시집 한 권에 오른쪽 승모근이 부어오르는 것도 모른 체 파워워킹을 시전 하려나? 사인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자신감 있게 오렌지 색 3호선에 탑승하고서 동호대교를 건너며 물들어 가는 서울을 확인하겠지? 그리고 아마 이렇게 생각할 거다. 모든 게 오렌지라고. 한눈에 들어온다고.






위 글은 지음지기의 프로젝트 ㄷ(디귿)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동네 한 바퀴, 압구정"에 관한 또 다른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지음지기의 그리는 사람(최정연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어쩌다 산책> / 최정연: https://m.blog.naver.com/choijungyon/22326431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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